올 가을, 나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낯선 이와 어울리는 자리를 병적일 정도로 꺼려하는 내가 10월에만 두 번의 번개 모임을 꾸렸으니. 첫 모임은 잠시 방한한 쓰지 신이치 선생님(‘행복의 경제학’‘슬로라이프’ 등을 쓴 일본의 문화인류학자)과의 ‘밥 먹는 밤’이었다.
페북으로 신청한 스무 명이 연남동의 작은 식당에서 만났다. 대부분 혼자 온 여성이었다. 일만 하며 살다 보니 꿈꾸던 삶에서 너무 멀리 와버려 쓸쓸하다고, 곧 회사라는 조직을 떠나야 하는데 그 후의 삶이 두렵다고, 슬로 라이프를 실천하려 해도 일상이 바빠 마음을 내기 어렵다는 고백들이 하나 둘 쏟아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은 선생님은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슬로 라이프는 물리적 속도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것이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관계, 나 자신이나 타인과 맺는 관계, 자연과 맺는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은 시간뿐인데, 그 시간을 타인과 나 자신과 자연과 더불어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시간을 주지 못하니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백설공주 그림책을 읽어주며 시간이 없어 7명의 난쟁이를 3명으로 줄인다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모임은 무려 4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그 밤은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가 관계를 갈망하는 외로운 존재임을 확인한 것. 마치 여행을 떠나온 것 같았다. 낯선 여행지에서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가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열흘 후, 나는 두 번째 ‘밤 시리즈’로 ‘책 읽는 밤’을 꾸렸다. 이번에도 페북으로 신청을 받았고, 한 시간도 안 되어 마감되었다. 나이 때문에 올까말까 망설였지만 끝내 오시는 용기를 발휘해주신 50대 여성도 있었고, ‘밥 먹는 밤’이 좋아서 두 번째로 찾아온 분들도 있었고, 여자친구를 따라온 청일점의 청년도 있었다.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로 정했다. 촛불을 밝히고, 싱잉볼을 울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는 짧은 시간을 가진 후 몇 편의 글을 돌아가며 읽었다. 찬바람 부는 가을밤, 광화문의 카페에 모여 앉은 우리는 고요히 몰입했다. 세 시간에 걸친 만남을 끝내고 돌아간 이들이 페북에 짧은 소감을 올렸다.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울려대는 발굽소리, 고래 이야기와 에스키모 노파의 춤이 생생하게 가슴과 머리와 귀를 스쳐간다.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렁이는 얕은 마음. 책 한 권으로 설레어 잠 못 이루고 괜히 막 맘이 충만해지는 밤이다.” “삶의 중요한 부분을 고민하는 좋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며 저녁을 함께하는 그 시간의 밀도와 따뜻함이 너무 좋았다” “척박한 나의 하루에 쉼표를 찍어 긴 호흡을 할 수 있었던 느리고도 값진 시간이었다” “목소리로 문장을 들으니, 글자가 아니라 사람을 읽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가슴에 담고 있는 성인 여자의 사랑스러움을 깨닫기도 했다”는 고백도 있었다.
그 글들을 읽다가 혼자 마구 뭉클해졌다. 힘이 닿는 한 이런 모임을 자주 꾸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말았다. 산책하는 밤, 음악 듣는 밤, 영화 보는 밤, 요리하는 밤 등등. 점들로 흩어져있는 이들이 모여 선을 만들고, 그 선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있도록. 저마다의 모순을 지닌 나약한 존재들이 모여, 서로의 약함에 기대어 살아가는 세상을 내 주변에서부터 만들고 싶어졌다.
인생의 그 어떤 경험도 그냥 지나가는 것은 없다. 지난 여름의 아프고 쓸쓸했던 날들이 내게 이런 변화의 기회를 주었으니.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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