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이란 말이 있다. 기억의 오류를 통해서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이 마치 과거의 어느 때에 분명히 체험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엊그제, 아랫집 반장님이 찬서리 내린다는 상강 전에 남은 사과를 모두 따야 한다며 일손을 부탁해서 갔다. 산꼭대기 움막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와 나 그리고 반장님 내외가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사과를 막 따고 있는데 작은 승용차 한 대가 과수원 길 옆에 멈췄다. 초면에 흔히 하는 사모님 대신 아줌마 소리가 저도 모르게 나올 것 같은 중년 여인이 사과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올라왔다. 옷은 아예 집에서부터 작업복 차림으로 온 모습이다.
사다리 위에서 사과를 따던 반장님 댁이 나 들으라는 듯 나직이 “저 아래 컨테이너에 살던 댁이라!” “작년 봄에 살러 왔다 가을에 사과 따고 올라가삣어!” 화장만으론 가릴 수 없는 그늘과 삶의 신산함을 향수처럼 바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컨테이너댁’이라는 택호만 얻어 갖고 다시 떠나간 짧은 시골생활이 왠지 그녀 내면에 상처 하나를 덧입혔을 것 같은 지레짐작으로 조심스럽게 대했다. 가급적 두어 그루 건너 뛴 나무에서 사과를 땄다.
새참으로 컵라면을 먹고 잠시 집에 가 토끼와 개 사료를 주고 오니 그녀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시인이라면서요? 참! 이런데 살면 시가 저절로 써지겠네요?” 머리를 긁적거리고 웃자 “우린 좋은 이웃이 될 뻔 했네요” “저 아래 빈 컨테이너요. 제가 작년에 살려고 했던 데예요. 여덟 달 살다 다시 도시로 갔지만요” “반장님네 형님 하곤 그때 친해져서 사과 따주러 온 거예요”. 사과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혼자소리 하듯 가끔 말을 했다.
“제 고향도 산골이죠. 능선을 넘고 오솔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어요. 읍내 여상을 졸업하고 작은 건설회사 경리로 근무하다 건물에 페인트칠 하러 온 총각을 만났지요. 그때 명함은 대표였는데 결혼해서 알고 보니 여기저기 일감 찾아 떠도는 날품팔이 페인트공이였지요. 황금어장에 배가 많이 뜨듯 건물이 많아야 칠할 것도 많다고 우리는 읍을 떠나 연고도 없이 인천으로 갔어요. 그이가 천장을 칠하면 나는 벽을 칠하고 열심히 했어요, 딸도 하나 낳고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기도 했지요. 그러나 우린 삶의 수많은 장벽을 모두 넘지 못했어요. 서로의 가슴에 페인트보다 진한 상처의 무늬를 새기고 돌아섰지요. 아이는 그이가 데리고 갔어요. 혼자 월세 방을 얻고, 자주 가던 미장원 동생의 보조로 일을 했죠. 세상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치와 굴욕이 있지요.
고향이 아닌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서 봄에는 과수원에서 꽃도 따고 열매도 솎아내고 가을에는 사과 따러 다니는 일을 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지금 저 아래 비어있는 컨테이너, 그곳에 제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견디질 못했어요. 시골에서는 현재보다도 과거를 더 알고 싶어 해요. 꿈을 찾아온 사람을 종종 실패자의 시선으로 봐요. 이 마을에서 저는 영원히 컨테이너댁이지요. 지금은 다시 그 미용실에서 피부마사지를 배워요. 과수원 형님은 그때 나에게 잘 해준 분이지요, 재미없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이곳저곳을 떠돌며 들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던 뫼꽃네라는 여인이 떠나질 않았다. 그녀는 마치 방물장수처럼 돌아다니며 콩 타작을 도와주고 들깨를 털어주고 아궁이에 불도 때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홀로 방을 쓰는 할머니가 아무리 들여 재우려 해도 끝내 부엌 잠을 자고 새벽이면 홀연히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뫼꽃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녀가 온 곳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가 간 곳도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을로 돌아오면 이집저집에서 불러 밥을 먹여주고 옷이 얇으면 장롱을 열어 헌 옷이라도 두텁게 입혀주었다.
들에, 밭머리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연분홍 뫼꽃은 나팔꽃을 닮았다. 낮에는 피어나 바람을 마시고 밤에는 오므려 이슬을 막는다. 스스로 설수 없는 이 덩굴식물은 등 비빌 언덕이 있어야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는 여리고 쓸쓸한 식물이다. 따지고 보면 이 한 세상 우리 모두 연약한 뫼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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