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은 오늘날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다. 흡연과 콜레스테롤 과다섭취 등의 비율이 높은 미국 성인의 주요 사망원인이고, 영국에서는 75세 미만에서 발생하는 암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면 사망률이 현저히 낮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약 11만명이 암에 걸리면서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생 직후부터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생존 연수인 기대수명대로 살 경우 남자 3명 중 1명, 여자 4명 중 1명에게 암이 발생한다는 통계도 있다.
암은 비숙련 노동자들이 전문직보다 두 배 이상 높은 발병률을 기록하는 등 불평등의 민낯을 드러내는 질환이기도 하다. 암을 예방하고 정복하기 위해 암 연구자들은 수많은 시간과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 암을 정복한다면, 죽음의 끈질긴 위협에서 벗어나 인간이 완전히 새롭고 안전한 노후를 꿈꿀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암 연구자들이 최근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 방법이 인간과 유사한 포유류 동물이 걸리는 암 질환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다. 특히 개와 코끼리는 의미심장한 연구대상으로 지목돼왔다. 개는 인간과 유사한 암 질환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개의 암 질환 연구를 통해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특히 개는 인간이 가장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진화해 인간과 매우 비슷한 생활방식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코끼리는 인간이나 개에 비해 암 발생률이 현저히 낮아 주목돼왔다. 암이 정상세포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무한 증식하면서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포의 수가 많을수록 그리고 수명이 길수록 암 발생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암 연구자들이 동물원과 야생에서 죽은 코끼리를 부검해본 결과 암으로 죽는 개체는 평균 5% 미만이었다. 1970년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페토 박사는 이러한 현상에 의문을 제기했고 암 과학자들은 이를 ‘페토의 역설’이라 일컬으며 지금껏 그 실마리를 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 비밀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개, 암 질환을 감지하는 ‘광산의 카나리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작은 도시인 세바스토폴에서 경찰로 근무하는 닉 벨리비우(28)는 차량 순찰을 나갈 때 독일 셰퍼드종 프랭크를 항상 데리고 나간다. 지난해 2월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행인 세 명을 검문하다 시비가 붙어 크게 다칠 뻔한 위기의 순간 프랭크가 자신을 구해주었다. 한 명이 깨진 유리병으로 자신을 찌르려고 하자 경찰차에서 대기하던 프랭크가 쏜살같이 뛰어 나와 이들을 넘어뜨려 단숨에 제압한 것이다. 생명의 은인인 프랭크가 올해 초 경찰서 주차장 구석에서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프랭크는 동물병원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수의사는 프랭크에게 “19주 정도 소요되는 화학치료를 받지 못하면 프랭크는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견인 셰퍼드의 평균수명은 10~12년으로 프랭크는 올해로 7년째였다. 사람 나이로 계산하면 프랭크는 올해 50세쯤 되는 것이었다.
개는 인간만큼 암에 취약한 동물이다. 개가 기대 수명대로 산다면 암에 걸릴 확률은 인간고 비슷하다. 특히 식습관과 환경 등의 차이로 아시아인과 백인, 흑인 등 인종에 따라 발병하는 주요 암 질환이 다르듯이 개도 견종에 따라 천차만별의 양상을 보인다. 스위스 베른이 원산지로 대형견인 버니즈 마운틴 독은 악성 종양 질환을 주로 많이 앓고, 중국 기원의 고대견종으로 사자와 곰을 닮은 차우차우는 구강점막의 입천장과 볼점막, 잇몸 등에서 발생하는 악성흑색종에 취약하다. 이는 순수혈통 유지를 위한 근친교배나 여러 종의 장점만을 섞는 무분별한 교배 등 특정 목적을 위해 수 세대에 걸쳐 개량이 이뤄지면서 치명적인 유전 결함으로 견종마다 특이한 암 질병이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사냥개에 이용된 비글이나 다리가 짧은 소형 사냥개로 독일에서 개량된 닥스훈트는 암 발병률이 현저히 낮은데 과학자들은 아직까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산업화 이후 인간과 반려견은 페인트 같은 화학성분이 내뿜는 유독성 물질과 인스턴트 식품 속 환경호르몬 등 발암물질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있다. 이 때문에 특정 지역 개의 암 발병률을 조사하면 해당 지역의 인간들이 나중에 겪게 될 암 발병률을 유추할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암 연구센터 대표인 매튜 브린은 “개는 인간과 같은 공기 같은 물을 마신다”면서 “플라스틱 용기에서 나오는 비스페놀, 탄 고기에서 발생하는 탄화수소 등 반려견은 주인과 동일한 발암물질에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개는 인간보다 몸집이 작고 수명이 짧은 만큼 동일한 양의 발암물질에 노출돼도 시기적으로 먼저 암이 발병할 확률이 크다. 이에 따라 특정 지역에 사는 개의 암 질환을 조사하면 해당 지역이 발암물질에 얼마나 오염됐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브린은 “미국 전체 가구의 약 절반 정도가 반려견을 키우고 있다”면서 “개들은 궁극적으로 탄광에서 유독가스를 먼저 감지해 위험을 알리는 ‘탄광의 카나리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끼리, 암 정복의 희망
코끼리는 수십 년 동안 암 연구자들이 가장 열심히 매달린 연구과제 중 하나였다. 세포가 많을수록 암 발병률이 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겼지만 코끼리는 이런 상식을 무너뜨린 존재다. 코끼리는 인간보다 약 100배 많은 세포 수를 가지고 있다. 페토 박사에서의 의문에서 시작된 난제인 ‘페토의 역설’을 풀 수 있다면 인간의 암 정복도 멀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애리조나 대학의 생물학자인 카를로 말리 박사가 최근 미국의학협회지(JAMA)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 비밀의 실마리를 풀었다. 페토의 역설의 비밀은 종양 억제 유전자 ‘TP53’를 확인한 것이다. 말리 박사는 코끼리의 세포와 정상인의 세포, 그리고 TP53에 돌연변이가 생기는 유전 결함인 리-프라우메니(LFS) 증후군 환자의 세포를 비교했다. 연구팀은 일반 세포들에 방사선을 쫴서 암세포로 변형시켰는데, 연구 결과 암세포가 죽는 비율이 코끼리는 14.64%로 가장 높았고 정상인은 7.17%, LFS 증후군 환자는 2.71%에 불과했다. TP53이 제 기능을 못한 LFS 증후군 환자에게서 암세포가 가장 적게 죽었다는 점은 코끼리와 정상인 사이에서 암 발병률의 차이도 TP53의 영향을 받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미국 유타 대학 헌츠먼 암센터의 소아 종양학자인 조슈아 시프먼 교수는 지난 8일 미국의학협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보통 인간은 TP53이라는 종양 억제 유전자를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하나씩 받아 총 2개에 불과하지만, 코끼리의 몸에서는 무려 40개나 발견됐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코끼리가 인간에 비해 TP53을 20배나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암 연구가들은 코끼리가 TP53을 압도적으로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대형 포유류인 코끼리는 종의 목표인 번식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22개월 정도로 굉장히 긴 데다가 한번에 적은 수의 자손을 출산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인 코끼리는 오랫동안 수명을 누리며 자손을 낳아야 한다. 이 때문에 코끼리는 체내에 TP53의 유전자 개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진화함으로써 인간과 비슷한 수명(70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암 질환으로 죽을 확률을 현저히 떨어뜨릴 수 있었다.
흰돌고래도 마찬가지다. 대형 포유류인 흰돌고래는 인간보다 약 1,000배나 많은 세포 수를 갖고 있지만 미국인의 약 25%가 암 질환으로 사망하는 반면 흰돌고래는 오직 18%만이 암으로 죽는다. 유타 대학 연구팀은 “TP53 유전자가 P53 단백질을 통해 암세포에 세포자살이라는 형태의 세포괴사를 유발시킨다”면서 “TP53은 암세포를 죽이는 권총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TP53의 명령을 받아 암세포를 죽이는 P53의 기능도 인간과 코끼리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간 내 P53가 암세포를 발견하면 고치거나 복원하려고 에너지를 쏟는 반면 코끼리는 암세포를 죽이는데 더 충실했다. 유타 대학 헌츠먼 암센터의 조슈아 치프먼 박사는 “인간이 중고차를 고쳐 다시 타려고 하는 거면 코끼리는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를 구입하는 식”이라며 “코끼리가 더 확실히 위험이 될 암세포를 완벽히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페토의 역설을 풀었지만 이 발견을 인간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인간이 2개만 가지고 있는 TP53 유전자를 암 질환을 막겠다고 코끼리처럼 40개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운 것은 물론 실제 그런 임상실험을 진행했을 때 인간 신체에 어떤 부작용이 초래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미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의 헬렌 딜러 가족종합암센터의 알랜 애쉬워스 센터장은 “TP53 유전자를 통한 접근은 기존의 화학치료 요법보다는 획기적”이라며 “하지만 인간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