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혹시나…" 경찰에 확인 덕
현장서 검거 성공, 추가 피해 막아
23일 오후 4시40분 불안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모(30)씨가 서울 서대문경찰서 지능팀 박호순(53) 경위의 눈에 띄었다. 이씨는 5만원 지폐가 다발로 들어있는 종이 봉투를 꺼냈다. 그는 “제 명의의 통장이 인터넷 물품거래 사기의 대포통장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아 금융감독원 직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며 “서대문서에서 최종조치를 한다고 하길래 확인하러 왔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임을 직감한 박 경위와 팀원들은 이씨가 금감원 직원을 만나기로 한 서울 지하철 시청역 1번 출구 앞으로 먼저 출발해 잠복했다. 이씨도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약속한 현장으로 갔다. 주변 조언을 듣는 것을 원천 차단할 목적으로 보이스피싱 일당이 전화를 끊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이씨는 휴대폰을 옷가지로 감싸 외부 소리를 차단한 채 이동해야 했다. 이씨를 만나러 나온 최모(19ㆍ여)씨는 이씨에게 ‘금융범죄 금융계좌 추적현황’을 보여주고 이름과 서명을 쓰게 한 뒤 3,000만원을 건네 받았다. 잠복 중이던 경찰은 오후 5시18분 현장에서 최씨를 긴급체포했다.
경찰이 압수한 최씨의 휴대폰에는 이씨에게 받은 현금을 잠실역에서 환전책에게 건네라는 지시와 마포역 인근에서 또 다른 피해자에게 2,970만원을 받은 뒤 신림역에 있는 환전책에게 건네라는 지시가 전달돼 있었다. 경찰은 체포한 최씨와 함께 곧바로 잠실역으로 이동해 한 시간도 안 돼 환전책 김모(30ㆍ여)씨를 체포했다. 오후 8시에는 마포역 근처에서 피해자를 만나 2차 피해를 막았다.
최씨는 이날 오전에도 경기 수원시에서 신원미상의 피해자로부터 2,000만원을 받은 뒤 신원미상의 남성 환전책에게 전달하는 등 총 6번의 지시를 받아 3번의 범행에 성공했다고 진술했다.
이씨가 인출한 3,000만원은 검찰 지휘에 따라 환부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증거품으로 보관되어야 한다. 자신의 돈을 당장 돌려받을 수 없는 불편이 있는데도 이씨가 피의자 검거에 적극 협조한 덕분에 이날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요즘은 경찰 추적에 꼬리를 밟힐 수 있는 대포통장으로 입금 하지 않고 아예 현금을 바로 받아 환전책을 거쳐 중국으로 송금하게 하는 형식으로 보이스피싱이 진화하고 있다”며 “당일 피의자를 검거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피해자의 적극적인 신고와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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