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뿌연 조그만 동그라미가 할리우드 스타 톰 하디의 입 주변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12월 개봉하는 영국영화 ‘레전드’의 예고편을 최근 보면서 눈도, 마음도 불편했다. 영국 런던 뒷골목을 주름 잡던 쌍둥이의 사연을 담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무시로 담배를 입에 문다. 거친 삶을 살아가는 사내들의 영화이니 흡연 장면이 곧잘 등장할 수밖에. 예고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레전드’ 예고편 속 흡연 장면 곳곳은 뭉개져 있었다. 지난 세기 한국 극장가에서 남녀의 주요 부위를 가리던 일명 ‘보카시 처리’가 떠올랐다. 영화 예고편은 전체관람가라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심의 방침에 따른 결과다. 청소년의 모방이 우려된다는 게 영등위의 입장이다.
상영 중인 미국 영화 ‘라이프’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불멸의 청춘 스타 제임스 딘의 한 때를 포착한 이 영화의 예고편도 딘(데인 드한)이 입에 문 담배마다 작은 동그라미로 가리고 있다. 긴 코트를 입고 어깨를 움츠린 채 담배를 꼬나 문 딘의 상징적인 형상은 그렇게 한국에서는 변형된 모습으로 대중을 맞고 있다. ‘라이프’의 수입사 관계자는 “개봉 일정이 촉박한 상황에서 심의 반려가 걱정돼 담배 피는 모습을 자체적으로 가렸다”고 밝혔다. 자기 검열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영화 관계자들은 담뱃값 인상 등 정부의 금연 정책 추진 강도가 높아지면서 영등위의 심의 잣대도 엄격해졌다고 말한다. 관계자들은 심의 때문에 영화를 원형대로 알리지 못해 안타깝다는 아쉬움도 드러낸다.
지난해에도 영등위의 심의 기준을 놓고 충무로에서 논란이 있었다. 영화 ‘관능의 법칙’의 포스터는 여배우의 허벅지 노출이, 외화 ‘폼페이-최후의 날’의 포스터는 남녀의 키스 장면이 문제가 돼 영등위 심의에서 반려됐다. 이제 남녀의 입술이 닿는 모습은 포스터에서 금물이라는 불문율이 충무로에 떠돈다.
물론 흡연과 음주는 적극적으로 장려할 만한 기호가 아니다. 남녀상열지사와 육체를 공공연하게 드러낼 이유도 딱히 없다.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등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고, 청춘들이 전철 안에서 거리낌없이 애정을 주고 받으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법이 아니고, 우리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흡연도, 음주도, 키스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주변의 모습인데 굳이 예고편과 포스터에선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 가리고 아웅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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