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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도서관에 간 공룡

입력
2015.10.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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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다. 공룡들이 도서관에 갔다. 육식공룡, 초식공룡, 털 있는 공룡, 매끈한 공룡 할 것 없이 다들 서울도서관과 서울광장으로 달려갔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룡은 진짜 공룡이 아니며 공룡을 사랑하고 때로는 자신을 공룡과 동일시하기도 하는 공룡마니아들을 말한다. 나도 그 공룡들 가운데 하나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웬만하면 한 번쯤은 공룡의 세계에 빠져든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공룡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사람들은 큰 것에 매력을 느낀다. 코끼리, 기린, 하마에서 고래에 이르기까지 큰 것들은 그냥 멋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남자들이 사냥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시대가 아니지만 아직도 전세계 여성들은 마치 자신들이 구석기 시대에 살고 있는 양 키 크고 어깨 넓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큰 동물들은 멋이 있다. 또 공룡은 지금 살고 있는 동물들과는 꽤나 다르게 생겼으며 게다가 이미 6,600만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에 멸종해서 지금은 볼 수 없다. 사라진 것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을 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이런 점 때문에 공룡이 매력적이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아크로칸토사우루스처럼 입에 잘 붙지도 않는 공룡의 이름을 공룡학자들보다도 더 많이 외우고 있다. 이들은 공룡들의 식성과 크기 그리고 무게에 놀랄 정도로 집중한다. 어려운 공룡의 이름을 많이 알고 그들의 크기를 정확히 외고 있다는 것은 이들 세계에서는 하나의 벼슬이다. 공룡에 도통한 아이들 주변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도록 공룡마니아로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간단하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재미가 없다. 아이들이 보는 공룡 책에는 질문이 없다. 그냥 사실만 나열되어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재밌는 질문이 있는 다른 분야로 관심을 옮겨간다. 일부 충성도가 높은 공룡마니아들은 결국 책과 도서관에서 멀어지고 자연사박물관과 인터넷 블로그의 세계에 빠진다. 그리고 정말로 마니아가 되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서울북페스티벌에 초대받은 공룡들은 처음에 당황했다. 북페스티벌에 공룡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룡들이 생각하는 북페스티벌은 왁자지껄하게 할인판매하는 책시장이 펼쳐져서 집에 갈 때는 양손 가득 책을 들고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공룡들이 보고 싶은 진짜 공룡책들은 우리나라에 나온 게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이미 있는 것들이다. 오죽하면 도서관에도 가지 않겠는가! 또 북페스티벌은 화려한 프로그램이 열리고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유명인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공룡들은 이런 곳을 별로 안 좋아한다. 공룡에 관한 프로그램도 없고 유명인 가운데는 공룡마니아도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공룡들은 초대자들을 의심했다. 북페스티벌이라는 게 원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특이한 프로그램이 있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를 평가 받고 다음 해에도 예산을 확보해서 페스티벌이 존속될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북페스티벌에서 시민들은 참여자와 소비자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서울북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서울도서관은 공룡을 왜 초대했을까? 관객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아니면 새로운 구경거리로? 공룡들의 의심은 합당했다.

서울도서관은 공룡들을 무턱대고 페스티벌 현장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진정으로 초대했다. 그렇다. 서울도서관의 사서들은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들은 북페스티벌의 슬로건을 ‘도서관아! 놀자’로 정했다. 시민이 관객이나 소비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축제의 기획자와 참여자가 되게 축제를 열어놓자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시민에는 공룡마니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공룡들은 서울도서관 사서와 여러 차례의 모임을 한 끝에 초대에 응대하기로 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박물관의 자연사도서관에서 공룡 관련 원서들과 거대한 트리케라톱스 머리를 비롯한 화석을 가지고 나가고 어린이 체험부스를 운영했다. 공룡마니아들은 공룡 가상체험(VR) 부스를 운영하는 한편, 자신들이 모은 화석과 공룡 모형을 전시하고 어린 공룡마니아들에게 거의 거저인 가격에 판매하기도 했다.

이틀에 걸친 휴먼북 프로그램도 매우 흥미로웠다. 공룡학자와 고생물 전문 과학기자를 비롯하여 일반 직장인과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대학생에 이르는 공룡마니아들이 시민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틀 동안 펼쳐진 아홉 개의 휴먼북 프로그램에 모두 참여한 초등학생도 있었다. 이 아이에게 휴먼북은 평소 도서관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책이었던 셈이다.

내가 가장 감동 받은 프로그램은 숭실중학교 독서반 친구들이 진행한 ‘질문 난장’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기자들이 눈만 껌뻑이던 황당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숭실중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이 친구들은 사람들이 왜 질문을 하지 않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숭실중학교 친구들은 공룡에 대해서도 엄청난 질문을 쏟아냈다. 서울북페스티벌에 초대받은 공룡들은 이 질문을 받고 행복했다. 과학은 질문이다. 책도 질문이어야 한다.

이번 서울북페스티벌을 통해 도서관은 건물이나 그 안에 비치된 수많은 책이 아니라 바로 사서들이 핵심 역량이요 생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년에는 어떤 이들이 서울북페스티벌에 초대를 받고 그들이 어떤 응대를 할지 사뭇 기대가 된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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