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읽는 세계사]제2차 세계대전과 전략폭격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1944년 6월 13일 꼭두새벽, 독일군은 흔히 ‘V1’이라고 불리게 될 중거리 무인비행폭탄 15발을 영국 런던으로 날려보냈다. 이 날 이후로 몇 달 동안 런던시와 그 부근에만 2,400발이 넘는 무인비행폭탄이 떨어져 5,000명이 넘는 영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이 신병기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붙인 이름은 페어겔퉁스바페(Vergeltungswaffe), 즉 보복병기였다. 보복이라니, 무엇을 앙갚음한다는 것이었을까. 보복병기는 영국 공군과 미국 항공부대가 여러해 동안 독일 영토에 퍼부어 온 전략폭격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해를 입은 독일인들의 복수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사전에는 전략폭격의 뜻풀이가 ‘전략상 중요한 적의 도시, 군수공장, 비행기지, 또는 전략적 병참선 등 유형적 혹은 무형적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표적에 대한 항공폭격’이라고 되어있다.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표적”이란 표현을 곰곰이 곱씹어보면 항공기를 이용한 폭격이 군사 목표, 시설에 국한되지 않고 민간 시설, 아예 도시 전체에 가해진다는 으스스한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1904년 12월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 비행에 성공해서 땅과 바다에 이어 하늘마저 사람의 활동 영역으로 만든 뒤로 나날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비행 기술로 가능해진 전략폭격이 본격적으로 수행된 최초의 전쟁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라이트 형제가 손수 만든 비행기를 타고 12초 동안 하늘을 난 지 딱 10년 뒤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창공은 이미 격렬한 싸움터가 되었고, 산맥이나 바다 같은 지리 장애물을 쉽게 극복하는 항공기는 국경을 쉽게 넘나들며 적을 공격했다. 항공기가 적국 국민에게 실질적 피해와 더불어 극심한 공포심을 안겨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되짚어보면서 앞으로는 항공력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적의 전투 능력과 항전 의지를 밑동부터 무너뜨리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전략폭격 개념을 구상한 이들이 있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에, 미국의 윌리엄 미첼, 영국의 휴 트렌처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의 구상이 실행에 옮겨지는 무대가 되었다.
전쟁 초기 독일군이 구사한 전격전에서 항공 공격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독일공군의 우두머리인 헤르만 괴링의 장담을 믿고 아예 공군력만으로 영국을 꺾겠다며 1940년 여름과 가을에 폭격기 편대를 끊임없이 띄워 보내 영국의 군사 시설과 민간인 거주 지역에 폭탄을 내리꽂았다. 이 브리튼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세계 최강의 제국을 공군력만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주장이 실행에 옮겨질 만큼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는 점은 확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브리튼 항공전을 필두로 폭격의 대상이 전투원과 군사 시설에서 민간인과 도시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히틀러도 아무리 적국의 국민일지라도 영국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 지역을 폭격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목표 달성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주저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런던은 밤낮으로 폭탄이 떨어지고 민간인 피해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히틀러와 괴링의 예상과 달리 영국민과 런던 시민은 꿋꿋이 공포를 이겨냈다.
이제는 나치 독일이 당할 차례였다. 1940년 5월에 됭케르크에서 성공적이지만 치욕적인 탈출을 한 뒤로 영국군은 1944년 6월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벌이기 전까지 유럽 본토에서는 지상전을 벌이지 못했다. ‘영국은 겁보라서 유럽 대륙에 제2전선을 열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소련 스탈린의 비아냥에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모욕감을 억눌러야 했다. 영국이 파시즘과의 전쟁에 나름대로 이바지하고 있다며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우세한 항공 전력을 활용해서 독일에 퍼붓는 폭격뿐이었다. 영국은 처음부터 독일의 도시를 폭격 대상으로 삼아 민간인의 인명 피해를 늘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그래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서 주위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략폭격을 지휘하는 인물이 영국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아서 해리스 경이었다. 그의 별명은 “도살자”였다. 영국의 독일 전략폭격에 미국도 참여한 뒤로는 낮에는 미군이 정밀 폭격을 하고 밤에는 영국이 지역 폭격을 한다는 업무 분담이 이루어졌다. 날이 갈수록 독일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특히 거센 전략폭격의 주요 목표가 된 함부르크와 드레스덴에서는 하룻밤 새 5만명이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주로 아녀자와 노인들이었다.
하지만 독일 국민도 꿋꿋했다. 영국의 트렌처드 경이 전략폭격 개념을 구상하면서 노린 바는 항공 전력으로 적국 민간인에게 견디기 힘든 피해를 입혀 폭동을 유발해서 적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파괴한다는 것이었지만, 영미군이 적잖은 피해를 참아가며 줄기차게 전략폭격을 수행해도 독일에서는 끝내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고, 히틀러는 전쟁 막바지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의 주요 도시 63개가 미군의 맹렬한 폭격을 받아 시가지 40%가 파괴되었고, 도쿄에서는 1945년 3월 9~10일 이틀 동안 B-29기 300대가 쏟아 부은 폭탄 비에 맞아 민간인 1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일본의 천황은 항복을 했을지언정 일본 백성들에게 타도되지는 않았다.
적국의 공장 지역이나 도시 전체를 폭격 목표로 삼아서 생산 능력을 마비시키겠다는 ‘도살자’ 해리스의 목표도 빗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의 군수생산 능력은 폭탄 비 속에서도 줄기는커녕 꾸준히 늘어났다. 생산라인을 여러 곳에 흩어놓아 폭격의 피해를 피한다는 나치 “엔지니어” 알베르트 슈페어의 꾀가 들어맞았던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전략폭격은 자잘한 효과는 거두었지만 적국의 전쟁 수행능력과 항전 의지를 꺾는다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민간인 피해를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높여놓으면서도 전쟁을 끝내지 못한 전략폭격은 전쟁의 비인간성을 극한대로 밀어 부쳤다. 땅에서는 자기가 죽인 사람의 주검과 자기가 부순 도시의 모습을 제 눈으로 봐야 했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싸움을 치르면서 무뎌지기는 해도 최소한의 윤리감을 유지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하늘 높이 날아 땅과 멀어질수록 전투원의 윤리감도 옅어진다. 비행기를 타고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비행대원들은 사람 목숨을 빼앗는 행위를 하면서도 인간이 지니는 도덕 감각을 지상 전투원들보다 더 빠르게, 더 아무렇지도 않게 잃는 경향을 보였다.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독일 병사들의 대화를 영미군이 도청한 자료가 이런 사실을 드러내준다. 한 독일공군 조종사는 폴란드 공격 때 자기의 출격 경험담을 동료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폭탄 열 여섯 개 가운데 여덟 개가 도시 안에 떨어졌지 집들 가운데로 말이야. 셋째 날에는 아무러면 어떠냐는 심정이 되었고, 넷째 날에는 즐거워졌어. 아침의 식전 오락 같은 거였지. 벌판에서 달아나는 군인을 기관총으로 몰아가고 총알 몇 발로 뻗게 만드는 일이 말이야.” 영미군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전략폭격 개념의 최고 절정은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일 텐데,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서 아무리 전투 임무로라도 10만명이 넘는 민간인의 목숨을 앗은 B-29 폭격기 대원 12 명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죄책감을 표명하지 않았다. 기장인 폴 티벳스 대령은 무시무시한 임무 비행을 수행할 그 폭격기에 자기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을 따서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을 붙일 만큼 스스럼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가 없지는 않았다. 스무 살을 갓 넘은 뉴욕 브루클린 출신 젊은이가 미육군 항공대 폭격기 대원으로 참전해서 독일 점령지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가운데에는 미군의 공식 역사에는 민간인 사상자가 다섯 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체코의 플젠 시 폭격도 있었는데, 그 젊은이는 전쟁이 끝난 지 한참 뒤에 플젠 시민을 만나 그 폭격의 민간인 사상자가 수백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그는 전쟁이 끝나기 3주 전에 명령을 받고 프랑스의 루아양 시를 폭격했는데, 1954년에 이 루아양 시에서 연구를 하다가 그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프랑스 민간인이 1,000명을 넘는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경험에서 얻은 윤리 감각은 그를 미국사의 아픈 구석을 골라 건드리며 미국 사회의 양심을 일깨우는 최고 지성인으로 만드는 한 계기, 그러나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옛날 아테네를 일깨우는 지성이었던 소크라테스의 후예가 된 이 역사학자의 이름은 하워드 진이다. 이 지성인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각지에서 수행한 숱한 전략폭격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온 힘을 바치다가 다섯 해 전에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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