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 크기의 기차가 무대 위를 오간다. 투시도법으로 그린 빌딩 그림의 뚫린 창문에 아인슈타인으로 분한 여자가 나와 수학 공식을 푼다. 3단 15칸의 격자무늬 ‘우주선’이 빛으로 번쩍이고, 각 칸에 들어간 연주자들이 상하좌우로 몸을 흔들며 연주한다.
23일 국립광주아시아전당 예술극장에서 공연한 이미지극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명성 그대로 ‘비주얼의 향연’이었다. 연극, 오페라의 내러티브를 의도적으로 단절시킨 이 작품은 1976년 초연 당시 서구를 휩쓸던 포스트모던 열풍과 맞물리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공연’(1999년 뉴욕타임스 선정)으로 기록됐다. 백열등이 할로겐, LED 등 ‘차가운 조명’으로 바뀌면서 “색채의 팔레트가 달라진 것”만 빼곤 40년 전 무대 그대로 재현됐다. 새로 제작된 세트로 2012년부터 이어진 세계 투어는 25일 광주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세트도 폐기된다.
이날 마지막 세계 투어 공연 전 기자들과 만난 연출가 로버트 윌슨(74)은 “(이 작품을) 아방가르드하다고 평가하지만, 매우 클래식한 작품”이라며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수학적인 계산 아래 만든 오페라”를 오랜 시간 설명했다.
이미지연극의 대가로 불리는 윌슨이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 미국 뉴욕에선 전형적인 액자형 극장에서 벗어나 주차장, 갤러리 등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자연주의, 심리주의 사조가 유행했다. 건축 미술 등 시각예술을 바탕으로 퍼포먼스를 펼쳤던 그는 유행을 거슬러 극장으로 되돌아 갔고, 무대라는 공간에 천착해 전통적 서사를 거부한 이미지극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제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이라며 “빛이 없다면 공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빛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선언한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을 소재로 한 전위 오페라다. 도레미파솔 5개 음계로만 이뤄진 음악이 반복 변주되며, 배우와 무용수들은 숫자를 세면서 무대 위를 돌거나 뛰는 즉흥 동작을 반복한다. “작품 구조는 클래식합니다. 하나의 주제가 있고, 그것을 변주한다는 건 클래식 음악과 똑같아요. 다만 줄거리가 없죠.(웃음)” 그는 “작품이 처음 탄생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 세대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며 “이 작품은 모차르트 오페라와 달리, 애초부터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 아니다. 나의 수백 개 작품처럼 찰나의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아인슈타인에게서 연상되는 3가지 이미지 즉 ▦기차와 빌딩 ▦법정과 침대 ▦야외와 우주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총 4막, 5개 막간극으로 구성된다. 예컨대 1막 기차와 빌딩은 기차를 배경으로 춤과 음악을 반복하는데, 서사가 탈구된 이런 장면은 수만 가지 자유로운 해석을 낳는다. 상대성이론을 ‘빛의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 비유해 설명한 아인슈타인에 대한 오마주란 해석부터,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와 이후 영화 산업이 만들어낸 판타스마고리아(환상)에 대한 실사예술의 저항이란 해석까지 다양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식이다.
압권은 모든 장면이 하나에 압축된 4막 3장이다. 우주선 내부라고 설정된 3단 15칸짜리 격자에 배우들이 들어가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점처럼 보였던 격자의 빛들이 점차 밝게 확대되면서 폭발할 것 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공연 내내 어느 장면을 찍어도 포스터가 될 것 같은 감각적인 무대와 조명(시각), ‘마약’으로 불리는 필립 글래스의 반복적인 음악(청각), 22도로 낮춘 서늘한 극장(촉각) 등 각종 감각을 자극하는 이 공연은 그러나, 21세기 한국에 너무 늦게 당도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익은 장면이 속출하는 이 작품은 쉬는 시간 없이 4시간 30분간 이어졌고, ‘전설’을 보기 위해 광주에 모인 공연 관계자들은 상당수가 수십 분~수 시간 자리를 비우다 커튼콜이 올라갈 때 나타나 기립박수를 쳤다. 568석 극장의 3회 공연 총 제작비는 20억원. 24, 25일에 공연은 매진을 이뤘다.
예술극장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시즌프로그램 ‘아워 마스터’를 개막하고 연극 ‘마지막탐험’(11월 27~28일), 음악극 ‘테사 블롬슈테트는 포기하지 않는다’(내년 3월 26,27일), 다원예술 ‘육체의 반란’(내년 5월 6~8일) 등 공연을 이어간다. (062)410-3617
광주=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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