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서해상 조업 중 北에 납치
며느리 "잘 살고 있다" 자랑만 거듭
“엄마!”
북측의 아들 정건목(64)씨는 남측의 어머니 이복순(88)씨를 보자마자 어린 아이처럼 달려가 이 할머니 품에 안겨 흐느껴 울었다. 43년의 세월은 20대의 앳된 청년을 환갑의 노년으로 바꿔 놓았지만, 여전히 그의 입에선 “엄마”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터져 나왔다.
한국전쟁 중에 헤어진 다른 이산가족들과 달리 이들은 건목씨가 지난 1972년 서해상에서 조업하던 중 납북되면서 영문도 모를 생이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북한 경비정은 당시 21세이던 건목씨를 비롯한 25명이 탄 쌍끌이 어선 오대양 62호를 61호와 함께 납치했다. 건목씨의 생존 사실은 우리 정부가 이달 초 납북자 및 국군포로 50명에 대한 북측의 생사확인을 의뢰하면서 밝혀졌다.
어려운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던 건목씨는 여동생들에겐 하염없이 자상한 오빠였다. 새벽에 일하러 나갈 때에도 여동생들 배고플까 자신이 먹던 밥을 항상 남겼을 정도로 정이 많았다. 그런 오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살았던 여동생 정매(56), 정향(54)씨는 건목씨가 또 다시 어디 가지 못하게 양팔을 부여잡고 “오빠야, 오빠야”를 부르며 절규했다. 건목씨는 이날 누나가 평소에 쓰던 안경을 선물로 받아 껴보더니 “신기하게 도수도 맞는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북한이 납북자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탓인지 어느 가족보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상봉이 진행됐다. 특히 건목씨와 함께 나온 북측 아내 박미옥(58)씨는 남측 가족들을 향해 “우리 남편이 남조선 출신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나라에서 다 잘 해준다. 걱정하지 말라”고 반복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주변이 시끄러워 건목씨가 어머니 옆에 앉으려 하자 미옥씨가 밀치며 다른 자리를 권해 떨어져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어머니 이씨가 “병원비 많이 들지 않느냐”고 묻자 며느리 미옥씨가 곧바로 끼어 들어서는 “땔감도 다 줘서 창고에 넣어 있다. 우리랑 같이 가 살자”고 거들기도 했다.
한편 또 다른 전시 납북자 가족인 문홍심(83) 할머니는 오빠 문홍주씨가 지난 1996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빠의 아들인 조카 문치영(48)씨와 조카 며느리 리경숙(48)씨를 만나야 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문홍주씨는 서울에서 철도고등학교 재학 중 배추밭을 둘러보러 갔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의용군에 징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의 가족들은 “아버지는 김책공업대학 2기 졸업생으로 당의 일꾼으로 기술공으로 그렇게 살아가셨다”며 문씨가 북한 체제에서 고생하지 않고 살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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