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인 14세기 등장한 유럽의 한자동맹은 상인들의 거대한 연합 공동체였다. 상인들이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국가나 황제의 통치를 받지 않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이를 중심으로 자유 도시들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 스웨덴의 스톡홀름, 벨기에의 부르게, 독일의 뤼베크 등이 이렇게 해서 발전한 도시다.
한자동맹의 기본 골격은 회원 도시들 간에 자유무역, 즉 역내 자유무역이다. 이를 통해서유럽의 회원 도시들은 수공예품 등을 비싼 가격에 동유럽에 수출하고 동유럽의 특산물인 목재, 모피, 역청, 탄산칼륨, 청어 등을 유리한 가격에 들여 왔다.
이렇게 역내 교역으로 높은 이익을 보았던 한자동맹은 급기야 독자적으로 해상 교역을 추진했다. 상품 보호를 위해 군대까지 조직해 해적 소탕에 나섰던 한자동맹의 도시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중세 교역망이 무너지면서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몰락한 것은 상인들에 대한 지나친 맹신 때문이었다. 한자동맹 도시들은 상인들에게 지방채를 발행해 거액의 돈을 빌려주었으나 교역에 실패한 상인들이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서 덩달아 도시들이 파산하게 됐다.
한자동맹은 1669년 마지막 회의를 끝으로 몰락했지만 가장 비중이 컸던 독일의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 세 도시는 1806년까지 도시국가로 살아 남았다. 이후 이들은 독일 경제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됐다.
이런 영향으로 독일엔 ‘한지아티쉬’(Hanseatisch)’라는 말이 있다. ‘한자동맹의’라는 이 말은 한자동맹 소속 도시들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 특성이란 쉽게 나서는 것을 꺼리고 섣불리 결정하지 않으며 상황을 끝까지 지켜본 뒤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 같은 한자동맹 정신은 오늘날 고스란히 독일기업들에게로 이어져 흐르고 있다. 독일의 대표기업 지멘스를 만든 베르너 폰 지멘스의 경영 철학은 ‘단기 이익을 위해 회사의 미래를 팔지 않겠다’이다. 즉 멀리 보고 오래 가겠다는 얘기다.
요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새로운 한자동맹 논란으로 뜨겁다. 특히 TPP의 경우 초창기부터 참여하지 못해 너무 늦었다는 질책이 잇따랐다. 이에 최근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은 TPP에서도 자연스러운 파트너가 될 수 있다”며 사실상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TPP 가입은 일부 여론에 떠밀리듯 성급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TPP 참여를 놓쳐 큰 일이라는 주장의 배경에는 회원들국간 교역에서 우리가 뒤쳐질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일본은 이번 TPP 참여로 미국에 수출하는 공산품 중 수입액 기준으로 관세 67.4%가 즉시 철폐된다. 이는 내년 1월1일부터 대미 수출 공산품의 96.9%가 무관세 처리되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물론 전자제품, 자동차 등을 미국에 수출하는 우리 입장에서 일본산 대미 수출품의 관세 철폐 비중이 늘어나는 것은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TPP 후발주자들에게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농수산 분야의 강도 높은 시장 개방 요구를 간과하면 안 된다. 이번 TPP에서 일본은 쌀 수입을 놓고 관세를 줄이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인 저율 관세 할당량(TRQ)을 정했다.
우리가 TPP에 후발주자로 참여하면 농수산물에 대한 개방 압력이 이보다 클 수 밖에 없다. 대일 공산품 무역에서도 우리가 일본산에 부과하는 관세율이 일본에 수출하는 우리 제품에 붙는 관세보다 높기 때문에 좋을 게 없다.
여기에 미국이 TPP에 참여하면서 금융, 미디어, 의료, 통신 등 서비스 산업의 개방을 강하게 요구한 점도 주의깊게 봐야 한다. 일부 뒤처진 서비스 산업 분야에서는 우리가 고스란히 시장을 내줄 수 있다.
역내 자유무역을 통해 발전한 한자동맹 도시들 가운데 독일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한자동맹 정신으로 지금까지 번영을 구가한 점을 눈 여겨 봐야 할 때다. 우리도 멀리 보고 오래 가는 결정을 해야 한다.
최연진 산업부장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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