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호영 옮김
이책 발행ㆍ328쪽ㆍ1만6,000원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 한창이던 2011년 가을, 미국인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그 현장에 있었다. 사회과학 명문인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 교수인 그는 노엄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 우파에게 가장 많이 공격받는 비판적 지식인이고 아나키스트다. 점령 시위에 탐욕스런 1%에 저항하는 ‘99%의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식 트위터 계정을 연 주인공이다.
‘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는 그가 당시 운동을 이끌면서 발견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제안이자 보고서다. 전체 분량의 절반은 점령 운동의 발생과 전개, 확산에 관한 기록이고, 나머지 절반에서 진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모색한다. 2013년 나온 원서 제목 ‘민주주의 프로젝트(The Democracy Project)’가 보여주듯 이 책의 초점은 회고가 아니라 전망이며, 답변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는 “우리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는 가짜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구체적으로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소수가 다중을 대리하는 제도를 불신하고, 풀뿌리식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헌법 어디에도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언급은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같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다수가 똑똑한 소수와 똑 같은 발언권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공포로 여겼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는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3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중심에 섰던 저자는 결코 끝난 게 아니라고 웅변한다.
한국을 포함해 외부에서는 이 운동을 주로 분노의 표출로 봤지만, 그는 다른 것을 보았다. 바로 상상력의 폭발이다. 종래 익숙하게 통했던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주문에서 깨어나그 너머의 다른 세상, 다른 체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 번 풀려난 상상력은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가둘 수 없으며 퍼져나간다는 믿음으로, 그는 99%를 위한 진짜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점검한다. 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제시하고 거기에 근접한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진짜 민주주의로 그가 지지하는 것은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을 혼란과 무질서로 여겨 꺼리는 통념과 달리 그는 아나키즘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목표로 한 정치적 운동”이라고 규정하며 아나키즘과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공들여 설명한다.
아나키스트 사회에서 어떤 종류의 조직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한다. “아마도 지금은 만들 수 없지만, 우리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형태의 조직”이라고. 여기에 하나의 전제를 붙인다. “이 조직들은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든 무장병력을 불러 ‘입 다물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하라’고 할 능력이 없어야만 존재 가능하다.”
이 책에서 똑 부러진 답, 즉 진짜 민주주의의 구체적 청사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런 반응에 대해 저자는 자본주의가 애초에 그런 청사진을 가지고 시작된 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다른 세상은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부터 깨라고 촉구한다. 이 책은 진짜 민주주의 프로젝트, 진정한 혁명은 이제부터라는 격문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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