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388쪽ㆍ1만4,500원
“사랑은 공평해야 돼요. 주고 받는 사랑의 크기가 동일하지 않을 때 윤리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죽기 전까지 사랑의 빚을 다 갚고 가는 게 순애의 윤리,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박범신씨의 신작 소설 ‘당신: 꽃잎보다 붉던(이하 당신)’은 순애보다. 5년 전 소설 ‘은교’로 노년의 꺼지지 않는 욕망을 조명했던 작가는 이번엔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사랑의 채무와 청산, 완성을 이야기했다.
‘당신’은 78세의 윤희옥이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 주호백을 집 마당에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호백은 평생 아내와 딸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죽기 몇 년 전 치매가 찾아오면서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장인 어른이 돌아가시기 전 몇 년 간 치매를 앓으셨어요. 증상 중 특이한 게 모두 잠든 밤에 복도에 나와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점잖고 말 없던 분이 매일 밤 소리를 지른단 얘기를 듣고, 저는 그 분이 혹시 치매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가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세상에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시는 게 아닐까 하고요.”
소설 속에서 치매는 오랜 세월 굳어진 부부의 불공평한 관계를 전복시키는 도구다. 호백은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던 분노―젊은 시절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희옥을 받아주고 아이까지 함께 길렀지만, 아픈 아이를 팽개친 채 다시 전 남자를 만나러 간 희옥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나쁜 년! 네가 그러고도 에미야? 수두에 걸려 죽을 둥 살 둥 하는 어린 것을 팽개치고 사내놈을 만나러 집을 나가?”
치매에 따른 합병증으로 죽어가는 호백을 간병하며 희옥은 천천히 과거의 빛을 갚아나간다. 남편의 뜻에 따라 그를 안락사시킨 희옥은 마당에 시신을 묻은 뒤 경찰에 신고하지만, 곧 자신이 남편을 매장했다는 걸 잊고 그를 기다린다. 희옥도 치매에 걸린 것이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사랑의 과오에 대한 회한과 반성이 컸다”고 말했다. 책에는 통상 붙이는 ‘작가의 말’ 대신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가 있다. “사랑에서, 주호백과 닮은 당신, (…) 사랑의 지속을 믿지 않는 남자 곁에서 그것의 영원성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살아온 오랜 당신, 나이 일흔에 쓴 이 소설을 부끄럽지만 나의 ‘당신’에게 주느니, 부디 순하고 기쁘게 받아주길!”
작가는 “아내와 나는 평생 불공평한 관계 속에 살았다. 젊은 시절 나는 자주 외박을 하면서도 어둑해질 때까지 아내가 집에 안 들어오면 더럭 화를 내곤 했다”며 “소설 속 부부가 치매를 통해 공평함에 도달한 것처럼 나도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이 책도 그런 노력 중 하나”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께 중단편소설 전집(전7권)과 작가의 문학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도 출간됐다. 전집엔 1973년 데뷔 이래 꾸준히 써온 중단편 85편이 수록됐다. 문학앨범은 강연문, 인터뷰, 좌담, 비평문 등으로 구성한 작가의 문학 연대기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 시인이 엮었다.
작가는 내년 여름까지 쓰기로 약속된 작품을 전부 소화한 뒤, 계약이나 청탁 없이 정말 쓰고 싶었던 글에 몰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설은 나한테 밥 같은 거라 안 먹으면 죽어요. 나이나 사회적 환경이 ‘예인’의 기질을 훼손시키지 못하더군요. 나로선 살기 위해 계속 쓸 수밖에 없습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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