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생전에 ‘시경’을 편집하고 ‘춘추’를 묶어냈다. 이는 중국사상 최초로 개인이, 그것도 관리가 아닌 ‘민간인’이 책을 편찬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는 또한 이 책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한자권 최초의 교과서 집필자가 공자였던 셈이다.
공자 이전까지만 해도 관리 아닌 자가 사사로이 학생을 모아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불온한 일이었다. 지식은 집권을 정당화 해주는 핵심 근거였기에 ‘민간인’이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세상이 혼란해지자 여기저기서 지식을 이용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주로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민간인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해갔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에 ‘전국구’ 급 명성을 지닌 선생이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문하는 늘 많은 수의 학생들로 붐볐다. 많을 때는 삼천을 상회했고, 아무리 적어도 칠십 명에 달하는 핵심 제자가 늘 그의 곁을 지켰다. 그들을 위해 공자는 민간 등지에서 불린 노랫말을 모아 ‘시경’을 엮었고, 춘추시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묶어 ‘춘추’를 편찬했다. 한층 능률적으로 가르치고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시도를 보란 듯이 성사시킨 결과였다.
그런데 그 책들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엔 천하 운영에 필요한 바가 듬뿍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문명의 요체가 실하게 담겨 있었다는 뜻인데, 짐작컨대 그 정도는 돼야 교재로 쓸 만하다고 여겼던 듯하다. 하여 이들은 단지 교재에 머물지 않고 경전의 반열에 올라, 이후 경전이 곧 교과서가 되는 전통을 일궈냈다. 물론 ‘천자문’ 같은 입문용도 있었지만 이는 대학, 그러니까 ‘큰 학문’을 하기 위한 ‘기초 지력(知力)’을 쌓아가는 교재일 따름이었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인 ‘어른다운 어른’의 양성은 오경과 사서 같은 경전 학습을 기축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시경’과 ‘춘추’는 그러한 ‘어른 되기’ 교육의 중추였다. 이들이 공자의 손을 거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자는 ‘시경’을 익히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진다고 했다. 반대로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어엿한 어른으로 바로 설 수 없게 되고, 국가의 대소사를 더불어 논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계했다. 단지 ‘시경’의 시 305편을 달달 외우면 된다고 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토대로 내정과 외교를 도맡아 처리할 수 없으면 외워봤자 뭔 도움이 되겠냐며 힐문했다. 그가 보기에 ‘시경’은 도덕적이고 유능한 어른이 되어가는 검증된 길이었다. 그리고 ‘춘추’는 어른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갖춰야 하는 공평무사한 판단 능력을 길러주는 원천이었다.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역사 기록이지만, ‘춘추’엔 천도에 비추어 잘잘못을 단호하게 심판한 공자의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의 붓끝은 군주라고 하여 비켜가지 않았고 권세가라고 하여 눙치지 않았다. 한(漢) 제국이 ‘춘추’를 헌법처럼 활용한 것도 이러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니 ‘민간인’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 맹자의 증언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춘추’를 익히며 어른이 된 이들이 권세나 이익에 굴하지 않고 선은 기리고 악을 정죄하니, 그런 사회에 국가를 어지럽히고 인륜을 저버린 자들이 어찌 기생할 수나 있었겠는가.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으로 전환된다고 한다. 그런데 국정교과서가 나오면 떨며 두려워할 이가 누가 있을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일본 우익들이 환호작약하며 반긴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기꺼이 인간답기를 포기한 이들이 떨기는커녕 희희낙락 반긴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그런 교과서를 내려 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쾌재를 연호하는 난신적자들의 모습이 그저 역겨울 따름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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