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 같은 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 런던 빈민가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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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 같은 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 런던 빈민가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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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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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32개 자치구 중 하나인 타워 햄리츠는 영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한다. 주민 22만 명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방글라데시인을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한눈에 봐도 허름한 주택과 상점이 늘어선 거리 끝은 바클레이, 씨티그룹, HSBC 같은 국제적 은행이 밀집한 신흥 금융지구 카나리워프와 맞닿아 있다.

빈부 격차로 확연히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는 이곳에 타워햄리츠 구는 신개념 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를 열어 주민의 삶을 바꾸고 있다. ‘생각 상점’이라는 뜻의 이름부터가 별난 이 도서관은 카페나 상점처럼 보인다. 2002년 개관한 아이디어 스토어 보우를 시작으로 2013년 생긴 아이디어 스토어 와트니마켓까지 5곳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것도 도서관이냐고 어리둥절할 만큼 혁신적인 운영과 서비스로 유명하다.

10월 2일 방문한 화이트채플의 아이디어 스토어는 야채 노점상이 즐비한 대로변에 있다. 차도르와 히잡 차림으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 흑인 남성 등 여러 나라 출신 이민자들이 분주히 오가는 거리의 대형 슈퍼마켓 옆에 자리잡았다. 현관에 꼼짝 않고 선 키 작은 할머니를 무심코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이 할머니, 어느 새 책장이 늘어선 1층 한복판의 소파에 편안히 앉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인형, ‘늙어감의 기술’이라는 전시 작품의 일부였다.

신개념 도서관 아이디어 스토어 화이트채플의 1층. 소파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늙어감의 기술’이라는 미술 전시의 일부로 배치한 인형이다.

아이디어 스토어는 상점으로 치면 잡화점에 가깝다. 책과 음반, DVD 등 각종 자료를 비치한 서가 외에 전시 공간과 카페, 다양한 강좌에 쓰는 스튜디오, 댄스 교습실에 딸린 샤워실까지 한 건물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집에 컴퓨터도 없는 주민이 많아서 컴퓨터를 많이 비치했다. 아이디어 스토어 다섯 곳이 운영하는 각종 평생교육 프로그램은 연간 800개가 넘는다. 컴퓨터 사용법부터 이민자를 위한 영어 교실을 비롯한 어학 강좌, 요리, 무용, 뜨개질, 요가, 창업교실과 구직자를 위한 기술 훈련과 이력서 쓰기까지 별별 것이 다 있다. 매년 1만명 정도가 등록하고 7,000~8000명이 수강할 만큼 인기가 높다.

이처럼 복합적인 기능과 독특한 공간 구성은 전적으로 주민들의 필요에 맞춘 것이다. 아이디어 스토어가 생기기 전 타워 햄리츠에는 13개의 도서관이 있었지만, 워낙 초라하고 운영도 부실해 주민의 82%가 도서관에 한 번도 안 가봤다고 할 만큼 이용률이 낮았다. 구청이 도서관 개선을 구상한 것은 1998년. 도서관에 왜 안 오는지, 어떤 도서관을 원하는지 묻는 것부터 시작했다. 표본으로 선택한 600명의 주민을 집으로 찾아가 1시간씩 심층 인터뷰하는 것을 포함해 2년간 체계적인 설문조사를 해서 전략을 세웠다. 주민들은 장 보러 왔다가 들를 수도 있는 편안한 곳, 밤에도 올 수 있게 늦게까지 여는 도서관, 일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 직업 훈련 등을 원했다. 아이디어 스토어의 현재는 그런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구청의 간단한 행정 서비스와 민원 업무를 처리해주는 원스톱 숍을 갖춘 곳도 있다.

여기서는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와 마시면서 책을 보거나 전화를 받는 것, 음악 듣기, TV 보는 것도 소리가 너무 크지 않는 한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규제하지 않는 게 규칙이다. 어차피 책을 빌려 가서 집에서 볼 때는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하는데 도서관에서는 그러면 안 될 게 뭐가 있냐는 거다.

아이디어 스토어 화이트채플은 런던 도심의 노점상이 늘어선 대로변에 있다.

결과는 놀랍다. 전통적인 도서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서관을 상점이라 부르고 실제로 상점처럼 운영되는 아이디어 스토어를 더러 못마땅해 하기도 하지만, 방문자가 4배 이상 증가하고 자료 대출은 280%, 만족도는 20% 이상 상승했다. 이제 타워햄리츠 주민들에게 도서관은 더 이상 멀기만 한 곳이 아니다. 내 집처럼 편안하게 드나들면서 책 보고 친구 만나고 취미 생활하고 취직 준비도 하는 곳이다.

아이디어 스토어의 부매니저 서지오 돌리아니를 비롯한 직원들은 이용자들을 ‘고객(customer)’이라고 불렀다. 상점에서 점원이 손님을 맞듯 비즈니스 마인드를 도입, 이용자들이 더 편안하고 환영 받는 느낌을 받도록 노력한다. 직원도 반드시 사서를 고집하지 않는다. 돌리아니씨는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곳이므로, 사람들과 어울리고 부대낄 줄 아는 사람을 직원으로 뽑고 직원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설명했다. 직원들은 1층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다가 어린이를 돌보거나 노인들을 챙기는 등 여러 가지 일을 돌아가며 한다.

아이디어 스토어는 2009년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다. 이용자들의 건강과 고용 증진을 강화한다는 계획에 따라 병원, 보건당국 등과 협력해 건강 관련 서비스를 늘리고 구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도서관이 보건소는 아니지만, 책과 독서가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런던 외곽 서덕 구의 페캄도서관도 지역 재생에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버려진 오두막이나 다름 없던 기존 도서관을 닫고 그 앞에 새로 지어 개관한 지 올해로 15년, 흑인과 히스패닉이 많고 슬럼으로 변해가던 페캄을 더 안전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5일 기자를 맞아준 직원 아쇼크 차우더리의 설명에 따르면 페캄도서관은 처음부터 지역 재생 계획의 일부로 건립됐다. 10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우범 지대로 변하고 마약 문제도 심각해서 어두워지면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오기를 꺼리던 동네가 변했다. 구청은 고층 아파트를 철거해 4층 연립주택 단지로 바꾸고 공원과 레저시설을 도서관과 나란히 배치해 주민들이 좀 더 편안하게 만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실업률도 떨어졌다. 2007, 2008년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 이후 잠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날 페캄도서관에서는 무료 건강 검진이 진행됐다. 보건당국에서 나온 간호사가 주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 가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예약하지 않고 와도 되는 무료검진을 주 3일 실시한다. 혈압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측정한다. 도서관은 그렇게 생활의 일부, 아니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런던=글ㆍ사진 오미환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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