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국 진출을 노리는 PD출신 지인을 만났다. 중국에서 성공해 편안한 노후를 보낼 구상을 하고 있다. 중국은 우리와 급이 다르다고 했다. 국내 유명 MC가 편당 출연료로 1,500만원 정도 받지만 중국에서는 그 10배란다. 알만한 국내 방송연예계 인사, PD들이 너도나도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게 이해가 갔다. 한류가 인기를 끌고 있는 동안 한 몫 잡으려는 뜻은 자연스럽다. 국경 없는 세계화 시대에 자본과 사람의 이동을 누가 막겠는가.
문제는 그러고 난 뒤의 일이다. 이 지인은 중국에 빨려 들어간 대만을 예로 들었다. 판관 포청천 같은 콘텐츠로 아시아를 주름잡았던 대만의 지상파, 케이블 방송이 속된 말로 ‘폭삭 망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타들과 PD들이 중국으로 몰려가다 보니 방송 질은 형편없어졌고, 중국 자본의 진출로 대만 방송계가 중국의 콘텐츠 하청기지로 변했다는 기사가 올 초부터 나와 있다. 우리의 유명스타들도 중국에 눈을 돌리고, 중국 자본은 국내 제작사 인수에 나서고 있다니 남의 일만도 아니다. 방송계에서도 대만 전철을 밟을지를 놓고 논란이 없지 않은 모양이다.
방송연예계 흐름을 꺼내 든 것은 최근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중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일침 때문이다. “중국은 한국 바로 옆에 있는 나라다” “중국이 법을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한다면 한국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중국 경계론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 간의 관계나 전략 수립에 지리적 요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중국에 제 할 말 못하는 나라로 비친 데는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미국의 기대와 압력이 가미돼 있겠지만, 실제 우리는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다. 운신의 폭이 좁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 자리에서 한미간의 밀접한 경제관계를 언급하기 위해 한미FTA 이후 늘어난 한국의 대미 직접투자액(360억달러)을 거론했지만 아직 FTA가 실현되지도 않은 중국에 대한 투자액수(480억달러)에 못 미친다. 오래전 우리의 최대교역국이 된 중국의 수출 비중은 이제 전체 4분의 1에 달한다.
2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지만 중국의 이해에 기댄 한국의 폭은 더 넓어질 것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무질서한 나라로 낮춰보던 당시에도 중국은 블랙홀이 될 것이란 예견이 있었다. 그래서 외국학자 가운데 약소국의 생존 전략으로 경제 다변화를 충고하는 이도 있었다. 이제는 중국 경제가 감기에 걸리면 우리는 몸져누울 판이다. 블랙홀은 비단 경제만 아니라 문화 등 다방면으로 번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제는 중국에, 안보는 미국에 묶인 우리 현실에 대해 양쪽의 구애를 받는 축복론으로 포장하는 정부 인사가 있지만 한가한 말이다.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형세다. 한반도로 밀려난 이후 숙명과도 같은 역사의 재연이다.
두 거대국가가 평화로운 균형을 이룬다면 우리 처신을 고민할 이유는 없다. 현실은 끊임없는 패권, 주도권 다툼의 와중에 있다. 국제정치, 군사, 경제 다방면에 걸쳐 양국의 경쟁체제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의 평화로운 부상을 원한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의 국익은 국제질서의 현상유지다. 중국은 인내심을 발휘하기에는 힘이 너무 올라있다. 평화로운 현상변경이 아니라 힘을 통한 현상변경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경제패권을 두고도 판을 흔들 계기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그 엄청난 땅덩어리를 두고도 주변국과의 영토 분쟁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계의 경찰국가인 미국이 발끈해 대응하는 것도 유화정책은 답이 아니라는 역사의 교훈에 따른 것일 게다. 중국 문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북핵이나 북한 문제보다 더 까다로운 사안이 될 게 틀림없다. 중국 관리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 됐다. 강대국만 주변국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진황 기획취재부장 jhchu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