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산돌 손양원(1902~1950) 목사 기념관이 20일 문을 열었다. 손 목사는 경남 함안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교해 일제 강점기와 좌우 이념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근ㆍ현대사를 ‘용서와 사랑, 화해와 헌신’이라는 가치로 살다 간 인물이다.
기념관은 손 목사가 태어나 칠원보통공립학교(현 칠원초등학교)를 다닌 칠원읍 생가터에 초가(草家)로 복원된 생가와 나란히 건립됐다. 3,656㎡ 터에 전시장과 기록보관실, 영상실 등을 갖춘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지어졌고 생가도 복원됐다. 기념관과 생가 복원은 손 목사의 모(母)교회인 칠원교회가 2008년 생가터를 사들이면서 시작돼 2010년 산돌 손양원기념사업회가 설립되면서 본격화했고, 국ㆍ도비와 군비 등 55억원을 들여 손 목사의 순교 65주기에 맞춰 개관했다.
손 목사는 1919년 3월 23일 칠원에서 일제에 맞서 궐기한‘칠원 장날 의거’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 장로인 손종일(1871~1945) 지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빼앗긴 비통함과 식민통치의 야만성을 지적하는 설교를 들으며 자연스레 그의 삶을 관통한‘사랑’과‘독립’의 뿌리와 줄기를 이 시기에 형성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을 키워 온 손 목사는 1919년 아버지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우유와 신문배달을 하며 야간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 귀국해 1929년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감만동 한센병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해 한센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1939년 전남 여수의 한센병자 교회인 애양원교회 한국인 2대 목사로 부임해 한센인들과 식사와 잠자리를 함께하며 사랑과 헌신의 삶을 실천해‘한센인의 아버지’로 존경 받았다.
손 목사는 1940년 “일본의 개국신과 일왕에게 참배할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수경찰서에 구금돼 종신형을 선고 받고 청주보호교도소로 이송됐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출소했다. 출소 뒤 보금자리인 애양원교회에 돌아왔으나 1948년 ‘여수ㆍ순천 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사태가 진정된 뒤 가해자 구명을 탄원하고 가해자들 중 주동자 한 명을 양자로 삼아‘원수를 사랑하라’란 성경 말씀을 실천해 ‘20세기 사랑의 사도’라는 칭송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나 한센병 환자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교회를 지키다 공산군에 체포돼 그 해 9월 28일 여수의 한 과수원에서 총살 당해 48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날 개관식에서 차정섭 함안군수는“손양원 목사의 애국혼과 박애정신이 묻어 있는 생가 복원 및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손 박사의 삶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2005년 4월 칠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손 목사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주도한 최경진 목사는“생가와 기념관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는 선생의 애국혼과 숭고한 박애정신의 배움터로, 국민들에게는 사랑과 용서의 의미를 되새기는 순교 신앙의 성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개관식은 1부 감사예배와 2부 개관식에 이어 ‘손양원 오페라 갈라콘서트’순교 65주년 기념예배 등으로 진행됐으며 손 목사가 수학했던 창신고는 손 목사에게 창신고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함안=이동렬기자d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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