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한옥마을 마당에 가짜 연못과 작은 배가 나타났다.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채 널브러진 ‘죽음의 배’다. 작품명은 ‘음과 양’. 한옥마을에 처음 와보고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전설의 고향’을 떠올린 전위예술작가 김구림(79)이 설치한 작품이다. 그는 “한국인을 흔히 한(恨)의 민족이라 하는데, 지금 시리아에서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은 난민들도 그런 한을 품었을 것”이라 말했다. 김구림에게 한의 정서는 한민족의 범위를 넘어 피폐한 전세계 정치환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연못 옆에 작은 무덤을 두어 망자의 넋을 위로했다.
‘단색화’로 대표되는 추상회화가 사랑을 받던 1970년대에 비주류는 전위미술이었다. 그 선구적 그룹 AG(Avant-Gardeㆍ한국아방가르드협회)의 일원인 김구림, 그 뒤를 잇는 ST(Space and Timeㆍ공간과 시간) 그룹을 주도했던 이건용(73) 성능경(71)이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이 20일 남산골한옥마을에 모여 미술전시를 열었다. ‘한국미술의 거장 3인의 동거동락’전이다. 한옥마을 마당이나 한옥 마루, 사랑방 등에 자리를 잡은 설치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의 정치 현실을 향해 있다. 이건용은 “우리는 아직 싱싱한 현역”이라고 했다.
미리 맞춘 것도 아닌데, 이건용도 김구림처럼 시리아 난민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시리아에서 터키로 탈출하다 바다에 빠진)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전쟁과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을 캔버스 위에 붙인 후, 캔버스를 등지고 붓을 뒤로 돌려 그림을 그리는 신체드로잉 기법으로 사람 외의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이건용은 “전쟁이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언제 우리의 현실이 될 지 모른다”며 “이 전시가 전쟁과 폭력에 시달리는 난민들을 조금이나마 구하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성능경은 한국 정치를 겨냥했다. 그는 ‘사색당파(四色黨派)’란 작품을 만들었는데,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을 오려 한옥 벽면을 도배했다. 그런데 얼굴을 쉽게 알아볼 수가 없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색으로 된 테이프를 눈에 붙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977년 발표한 ‘특정인과 관련없음’을 부활시킨 작품으로, 언론과 권력이 개개인을 특정 정파로 딱지 붙이는 행태가 자유로운 정치 발언과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현실을 야유한 것이다.
한옥에 수묵화나 민화가 아니라 전위예술가들의 작품이 들어선 것은 이들이 70년대부터 이벤트 예술을 벌이며 상식을 깨뜨리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해 온 것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용은 “이 곳이 오늘 내 생각을 풀어내는 집이라는 생각으로 전시 내용을 자유롭게 짰다”고 말했다. 전시기획을 맡은 김노암 세종문화회관 시각예술위원은 “남산골한옥마을은 서울 시내 잘 보존된 한옥을 한 자리에 모은 테마파크지만 그 안에는 실제 삶이 없었다”며 “이 테마파크 안으로 살아 숨쉬는 현대미술 작업을 끌어들인다면 공간 자체가 현대적인 의미를 얻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11월 9일까지. (02)2264-4412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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