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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이 잘 만드는 ‘밀푀유’

입력
2015.10.2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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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개의 잎사귀란 뜻을 가진 밀푀유.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맛있게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빵이다. 고제욱 셰프 제공
1,000개의 잎사귀란 뜻을 가진 밀푀유. 만드는 사람이 행복해야 맛있게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빵이다. 고제욱 셰프 제공

케이크를 만드는 남자. 작디작은 디테일 하나에도 섬세해야 하는 나는 파티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건너왔으니 꽤 오랜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지만, 케이크를 즐겨먹었던 것도 아니고 크게 관심도 없었다. 국제경영학을 전공하는 전형적인 한국인 남자 유학생일 뿐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서 한국에 들어와 취업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왜 불현듯 파티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결혼 후 생긴 음식에 대한 관심으로 음식사회학 석ㆍ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파리에서 함께 살던 친누나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이야 남자 셰프가 흔하지 않고, 디저트가 붐을 이루는 추세지만, 그때만해도 셰프, 그것도 패스트리 셰프는 남자직업으로 탐탁지 않은 게 분명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던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 르 코르동 블루에 입학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제과를 배우기로 결심했지만, 유명한 제과점 하나 알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나는 일단 내 입에 맛있는 빵부터 사먹어 보기 시작했다. 파리는 동네 빵집조차 너무 맛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일단 가까운 곳부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먹어본 게 밀푀유. 정통 데코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멋을 내지 않아 투박하지만 정말 진한 맛이 어우러졌던 케이크였다. ‘이런 케이크를 만들면 재밌겠다. 레고처럼 하나하나 조립하듯 쌓아 올리고 과일을 올리면….’ 머릿속에 하염없이 케이크에 대한 생각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버터로 만들어진 빵들은 한입 먹었을 때 올라오는 버터향이 강한 기억을 남긴다. 내겐 그 대표적인 게 밀푀유였다. 다른 매장들이 생크림을 넣어 부드러운 크림으로 이루어진 밀푀유를 만들 때, 내가 크렘 무슬린(버터를 섞은 크림)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층 더 묵직하게 만들어주는 버터의 풍미가 일품이니까. 1,000개의 잎사귀라는 뜻을 가진 밀푀유는 바삭한 파이지와 크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파이는 반죽과 버터가 겹겹이 층을 쌓으며 반죽이 이루어지는 부분이 관건이다. 일반 버터에 비해 수분량이 적은 드라이버터를 이용해 밀가루 반죽으로 버터를 덮어준 후 길게 밀어서 접고 밀고 휴지시킨다. 다시 접어서 밀고 펴는 몇 차례의 작업을 통해 완성한 후 얇게 밀어서 구우면 파이가 완성된다.

걸음마 단계였던 나와 달리 르 코르동 블루의 동료들은 할 줄 아는 게 참 많았다. 특히 한국에선 홈베이킹이 유행이었던 터라 나는 수업 내내 좌절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인턴으로 현장에 나가보니 그마저도 꿀 같은 시간. 내가 인턴을 한 기간은 프랑스의 모든 제과점이 1년 중 가장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하루에 열네 시간 이상 일하는 게 기본이었다. 기계를 돌리고 나면 기계 닦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프랑스의 모든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마다 먹는 통나무 케이크 ‘부셰(buche)’.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프랑스 전역의, 모든 디저트숍의, 전 직원이 부셰를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머어마한 판매량을 자랑하는 케이크다. 인턴이었던 나도 공장의 기계처럼 부셰를 만들고 장식하곤 했다.

그 와중에 놀란 건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이 정말로 열심히, 치열하게 일하는 모습이었다. 살얼음판처럼 돌아가는 프랑스의 제과주방에서 뜨겁게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케이크 만드는 건 생각하는 것의 딱 열 배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워야만 더 예쁘고 맛있는 케이크가 나온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

4년 전 한국에 돌아와 매장을 내고 1,000개의 케이크라는 뜻의 ‘밀갸또’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쇼케이스에 수 많은 케이크를 채워 넣고 있지만, 한 가지 케이크만은 요일을 정해 만들기로 약속하고, 밀푀유로 정했다. 반죽에만 휴지기간을 포함해 사흘이나 걸리는 밀푀유는 요일을 정하지 않으면 힘들어서 미룰 것 같았고(그땐 파이롤러도 없었다!), 혹여 다 못 팔아 폐기가 생기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았다.

그렇게 주말마다 만들어 판매하는 밀푀유는 언제나 솔드아웃이다. 만드는 사람들의 고생스러움을 알아주시듯 고객들도 정말 맛있게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많이 주신다. 주중에도 팔면 안되냐는 제안도 정말 많다. 참 감사한 일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행복한 사람이 만드는 케이크가 가장 맛있는 케이크라는 사실. 밀푀유가 내게 가르쳐준 진리다.

고제욱 밀갸또 셰프
고제욱 밀갸또 셰프

*고제욱 셰프는?

2010년 프랑스 파리 르 코르동 블루 제과과정을 마치고 조교 및 인턴 등의 경험 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밀갸또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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