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음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 ‘세계의 문학’ 발간이 중단됐다. 40년 역사의 문예지를 접고 새 잡지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어떤 이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지만, 문단 내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다. 한 시인은 “문단에서 문예지 시효가 다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며 “변화하지 않는 곳은 여력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못 바꾸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민음사가 하반기에 선보일 새 문예지의 콘셉트는 ‘독자 지향’이다. 무거운 시론과 난해한 비평으로 독자로부터 멀어진 문예지를 다시 독자 곁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다. 민음사의 변화는 최근 문예지 판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세대교체 바람의 한가운데 있다.
즐길 거리, 사소한 문학을 위한 시도
최근 3호가 나온 잡지 ‘더 멀리’는 김현, 강성은, 박시하 등 젊은 시인들이 주축이 돼 만든 독립 잡지다. 노트 크기의 작고 얇은 잡지에는 시, 소설 외에 온갖 잡문들이 실렸다. 눈에 띄는 건 작가가 아닌 일반 독자의 글도 있다는 점이다. 만드는 이들의 구호는 다음과 같다. “‘더 멀리’는 문학 비문학, 등단 비등단 또는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쓰길 원하는 모든 이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함께 더 멀리 가요.”
이는 기존의 문예지들이 등단 작가, 특히 자사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 위주로 글을 싣고 비평을 하는 것과 뚜렷이 대조된다. 새로운 문예지에는 비평은 없고 글들은 통상 ‘문학적’이라 부르는 것들과 거리가 멀다. 서윤후 시인은 ‘동대문 갈치조림 잘하는 집’에 대해, 신해욱 시인은 영화 ‘우리의 환대’에 대해 썼다. 김현 시인은 “기존의 문예지들보다 형식적으로는 조금 더 작고 얇으며, 내용상으로는 조금 덜 무겁다. 보통 시, 소설, 산문과 영화와 SF 도서 리뷰, 사진, 악보, 독자 투고 작품으로 한 권이 구성된다”고 밝혔다.
은행나무 출판사가 창간한 격월간 ‘악스트’, 문학동네 출판사의 장르소설 임프린트 엘릭시르가 펴내는 격월간 ‘미스테리아’ 도 기존 문예지 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7월 창간한 ‘악스트’는 문예서평지를 표방한다. 패션잡지 못지 않게 미끈한 외양에, 비평이 아닌 서평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전문가’ 해설이 아닌 비전문가들의 수다장을 만들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아직 수다라 하기엔 글이 무거운 편이지만 앞으로 필자를 독자, 편집자, 기자 등 문단 바깥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장르소설 전문지 ‘미스테리아’는 최근 나온 2호에서 ‘여성 혐오’를 화두로 머리말을 열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등 복수하는 여자들을 다룬 장르소설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은밀한 억압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신생 잡지들의 지향점은 문학을 ‘즐길 거리’로 바라보는 태도로 수렴된다. 지식인들의 무게 있는 시론과 전문가의 학구적인 문학 비평 대신 이들이 찾는 것은 발랄하고 읽을 맛 나는 글이다. 등단이나 문학상 같은 ‘계급장’은 뗀 채, 쓰고 싶어하고 읽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에게 장을 열었다.
한 기성 계간지 편집위원으로 있는 시인 A는 “기존 문예지들은 문학이 사회를 선도하는 시대에 태어났지만 이제 문학에 그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다”며 “최근 잡지들은 그 반대편에서 더 사소하고 대단찮은 문학을 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그는 시론의 유무로 ‘옛날 문예지는 정치적, 요즘 잡지는 비정치적’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기성 문예지의 시론은 정확히 말하면 투쟁현장에 대한 담론입니다. 거기엔 성적 소수자라든지 생태, 여성 문제 같은 현대 사회의 화두는 빠져 있어요. (문예지에서) 정치를 논한다 해도 방식이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1970~80년대에 소주 마시고 나라 걱정하다가 김광석 노래로 마무리하는 정서가 아직도 연명하는 셈이니까요.”
제도권 문학의 변화 어디까지 갈까
이 와중에 ‘세계의 문학’ 폐간은 작금의 변화가 변방이 아닌 제도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신호다. 새 잡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논의 중이지만, 독자에게 재미 있는 소설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위해 비등단 작가, 대중문학, 웹 전환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민음사에서 책을 낸 B 작가는 ‘독자 지향’이란 말이 용납되지 않는 풍토를 개탄했다. “어떤 출판사가 독자를 지향한다고 할 때 한국 문단에선 비난부터 쏟아집니다. 대중적?상업적이라는 거죠. 하지만 어떤 소설이 1만부 팔렸다고 할 때 책을 산 1만명은 대중이 아닌 고급 독자예요.” 그는 대부분의 문예지가 이 고급 독자들마저 소외시킨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독자와 괴리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모든 문예지가 그렇다는 건 문제입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다른 게 나오면 문학이 망가질 것처럼 난리가 나니까요.”
신생 문예지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현재까지 긍정적인 편이다. ‘악스트’는 7~8월호 초판 5,000부가 일주일 만에 매진돼 5,000부를 또 찍었고 9~10월호도 7,000부가 팔렸다. ‘미스테리아’는 2호 초판 2,000부를 3일만에 다 팔고 1,000부를 다시 찍었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창간한 ‘더 멀리’는 한 달 만에 목표 금액 300만원을 채웠다.
그러나 민음사 외에 주류 대형 출판사들이 모두 이런 변화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다. 대형 출판사 문예지들은 국내 작가들 원고의 상당 부분을 수합하는 통로로 기능이 굳어져 운신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문학동네는 가을호에서 일련의 변화를 예고했으나 콘텐츠 대중화보다는 시스템 개편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문학동네 봄호 개편 논의를 이제 막 시작해 결정된 바가 없다”며 “지난 번 문학권력 논쟁 때 지적 받았던 부분을 검토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창비와 문학과지성사는 따로 개편 방안을 발표하지 않았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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