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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8종 쟁점 비교 ①

입력
2015.10.1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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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8종~12항목 논란 중심 비교

"편향으로 해석하기엔 무리" 評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검인정 역사 교과서 8종.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 이후 보수와 진보 간 ‘역사 전쟁’ 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 여당은 국정화 강행 이유로 현 검인정제 교과서 내용의 ‘좌편향’을 꼽고 있다.

본보는 4회에 걸쳐 편향성 논란에 휩싸인 교과서 내용을 발췌해 게재한다.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여연)이 2013년 9월 30일 작성한 ‘한국사 교과서 8종 비교-12항목을 중심으로’라는 보고서를 근거로 12개 항목을 선정해 나누어 싣는다. 8개 교과서는 여당이 좌편향이라고 지목한 7개와, 보수 성향 필진이 집필한 교학사 교과서다. 이 보고서는 박 대통령이 “교육 현장에서 진실과 역사의 왜곡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언급(2013년 6월)한 직후 작성된 보고서다. 정부 여당은 이 보고서를 주요 근거로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주장했다.

본보는 보고서가 발췌한 대목과 그 전후 내용을 실제 교과서에서 찾아 비교ㆍ분석했다. 항일 운동의 전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분량과 경중, 한국독립의 원인과 배경에서 국제적 요인과 우리의 독립노력 동시 서술 여부 등은 차이가 인정될 만한 정도였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정부에 대한 평가 등 차이가 분명한 항목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이 동일하게 구분된 대부분의 항목에서 시각 차는 존재했으나 종합적으로는 정부여당의 주장처럼 극도의 편향성으로 국정화가 불가피하다는 근거가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본보의 판단이다.

지면사정으로 여연 보고서의 8개 교과서 발췌본 모두를 넣지는 못했다. 다만 7개 교과서 중 전국 고교 70% 이상에서 채택한 미래엔, 비상교육, 천재교육 등의 교과서와 이와 시각이 다르다고 평가받는 교학사 교과서의 쟁점 부분을 게재해, 독자들에게 국정화 방침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

◆3ㆍ1운동 이후 항일 운동의 전개◆

1)천재교육

3ㆍ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독립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훗날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학교 설립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문맹 퇴치 운동 등 실력 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3ㆍ1운동 이후 국내의 일부 청년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약소민족의 해방지원을 약속한 것에 반해, 서구 열강이 파리 강화회의, 워싱턴 회의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냉담하였던 것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국내의 청년 지식인들은 독서회, 토론회, 강연회 등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선전하였으며, 신문과 잡지에 이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종 사회운동을 주도하거나 그 활동을 지원하였다. -? 사회주의자들은 일제로부터 독립과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254쪽)

2)미래엔

3ㆍ1운동 이후 일부 청년과 지식인은 식민지 민족에 대한 지원을 내세우는 소련에 기대를 걸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사회주의 운동은 기존의 민족주의 운동과 추구하는 목표나 방향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농민과 노동자를 단결시켜 일제를 타도하려는 목표와 더불어, 사유 재산 제도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려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지주와 자본가가 중심이 된 민족주의 운동과도 갈등을 빚으며 대립하였다. (264쪽)

3)교학사

3ㆍ1운동 전후 해외에서는 당시 식민주의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사회진화론에 대한 대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원칙으로서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하였고, 러시아의 레닌은 제국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공산주의를 제기하였다. 또한 크로포트킨 등은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주장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258쪽) 우리 민족이 3ㆍ1운동을 통하여 독립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였으나, 이제는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 역량을 기르고 외교활동을 통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을 하자는 새로운 전략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 교육, 언론,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독립 역량을 축적하기 위한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259쪽)

개괄: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기술과 분량이 논란의 핵심이다. 대부분 사회주의를 다루면서 노동자와 농민에 미친 영향을 서술했다. 시대상과 사상적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기술인데, 보수진영에서는‘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한다’며 좌편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편향 논란을 낳은 교학사는 관련 기술을 줄이고 민족자결 주의나 실력 양성 운동 등 우파 중심의 독립운동에 의미를 부여했다.

◆민족 자결주의와 해방운동◆

1)천재교육

러시아 혁명 정부는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으며,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포기하고 식민지 및 반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세계 혁명을 목적으로 코민테른을 창설하였으며, 1922년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다(240쪽) 미국은 전후 최대의 채권국이 되어 세계 경제를 좌우하였으며, 국제 질서의 재편을 주도하였다. 미국은 1921년 워싱턴 회의를 개최하여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열강 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하였으며, 전함의 비율을 국가별로 확정하였다. ? 또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주도적 역할이 확립되었다(241쪽)

2)비상교육

레닌은 각국의 사회주의자들을 연결하는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을 만들고, 각국의 노동 운동과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한다고 선언하였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267쪽)

3)미래엔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등장은 식민지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레닌은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여 억압받는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했으며, 제국주의의 수탈에 신음하는 민족의 독립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를 받고 있던 아시아 각국의 많은 지식인은 사회주의 사상을 반제국주의 민족 운동의 새로운 이념으로 적극 받아들였다. (239쪽) 제1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모인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하였다. 이에 앞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했는데, 혁명을 이끈 레닌은 반제국주의를 내세우며 식민지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식민지 약소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258쪽)

4)교학사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나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제창은 세계 각지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운동을 고양시켰다.(234쪽) 산주의는 노동 계급의 독재를 위해서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제국주의의 지배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정치사상이다. 1919년 공산주의 세력은 레닌의 주도하에 코민테른을 조직하여 전 세계에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전 러시아 공산당은 전 세계 공산당들의 지도적 지위를 자처하였다. (300쪽)

총평: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가 당시 식민지 약소민족에 대한 해방 운동 지원한다는 내용을 넣은 것이 좌편향 논란을 제기한 측의 근거가 되고 있다. 당시 아시아ㆍ아프리카 식민지배 지역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를 설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교학사는 공산주의에 대한 기계적 설명과 함께 공산주의가 전 세계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라고 풀어 나갔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기술◆

◇민족주의 운동 기술 일반◇

1)천재교육

민족 자본의 육성과 근대 교육의 보급, 전근대적인 의식과 관습의 타파를 통한 신문화의 건설 등을 목표로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발전과 민족 근대의 독립의 토대를 마련하려 한 점에서 의의가 깊다. 하지만 이 운동은 사회진화론과 문명 개화론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양육강식, 우승열패라는 제국주의의 침략 논의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실력 양성 운동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전개되었고 ‘선 실력 양성, 후 독립’을 내세웠지만 점차 실력 양성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257쪽)

2)교학사

일제가 1910년대의 호황으로 일본 내 축적된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회사령을 철폐하자(1920), 보다 쉽게 상법의 절차에 따라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 수가 한국에서 1919년에 360여 개에서 1939년에는 약 3,600개까지 급증하였다. 한국인의 공장 비율도 1910년대 초에 25% 미만에서 1930년대 말에는 60%를 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공장 대부분은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한 규모였고, 법인으로 등록한 회사 자본 중에서 순수한 한국인 자본 비중은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인 상공업자는 경제적 자립이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 민족 경제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민족 자본이 투자된 경성 방직 주식회사나 화신 백화점 외에도 평양의 메리야스 공업과 고무신 공업은 우리 민족의 기호에 맞고 내구성이 강하며 값싼 제품을 생산하여 일본 기업과 능히 경쟁할 수 있었다. (278쪽)

물산장려운동의 계몽행진. 일제를 이기려는 민족운동의 한국면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의 계몽행진. 일제를 이기려는 민족운동의 한국면이었다.

◇물산장려운동◇

1)비상교육

‘내 살림 내 것으로’ 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개된 물산 장려 운동은 토산애용 부인회 같은 여성 단체가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때 민중들의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고, 민족의식을 높이는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그 성과가 기업의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자본가와 상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운동이라고 비난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294쪽)

2)미래엔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된 우리의 선조들. 멕켄지의 '조선의 비극'에 실린 이 사진이 말해주듯이 맥켄지는 일제의 질곡에 시달리는 한국인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갖고 있었다.
일제에 항거하다 투옥된 우리의 선조들. 멕켄지의 '조선의 비극'에 실린 이 사진이 말해주듯이 맥켄지는 일제의 질곡에 시달리는 한국인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갖고 있었다.
1947년 북조선 노동당 남포시당 제 2차 열성자대회모습. 주석단 뒤에 레닌, 김일성, 스탈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1947년 북조선 노동당 남포시당 제 2차 열성자대회모습. 주석단 뒤에 레닌, 김일성, 스탈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물산 장려 운동은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구호를 앞세우며 민족 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ㆍ단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때 대중에게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으며 토산폼 애용 의식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일부 상인의 농간으로 상품 가격만 오르는 경우가 있었고, 사회주의자로부터 자본가와 상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운동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265쪽)

3)교학사

일제는 회사령의 철폐(1920)와 일본과 한반도 간의 무관세 정책(1923) 실시. 조선 물산 장려회는 산업 장려, 국산품 애용, 경책적 지도 등의 활동 방침을 수립하고, 전국에 분회를 설치해 대중적 계몽 운동을 1930년대 말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자본가와 상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259쪽)

총괄: 대부분의 교과서 내용이 비슷한 것으로 평가 받는 항목이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자들을 비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민족자본 육성 운동을 주도한 자본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시각 차가 있다. 교학사는 당시 국내 상공업자의 관점으로 민족자본 육성 운동이 애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반면, 나머지 교과서는 이 운동의 한계에 방점을 뒀다.

이대혁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김현수기자 ddackue@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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