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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빛, 글래머는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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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빛, 글래머는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

입력
2015.10.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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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머의 힘

버지니아 포스트렐 지음,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발행ㆍ480쪽ㆍ2만5,000원

제목과 표지 사진만 봐선 무슨 책인지 내용을 가늠하기 힘든 이 책은 영어 단어 ‘글래머’(Glamour)의 본질과 역사를 집요하게 분석한 일종의 문화비평이다. 글래머라고 하면 한국인은 가슴이 풍만한 육감적인 여자를 떠올리지만, 이 단어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하고 긴 역사와 맥락을 갖고 있다. 사전적으로는 화려함과 매력, 부티, 귀티 등을 뜻하는 중의적 단어다.

제목 ‘글래머의 힘’, 부제 ‘시각적 설득의 힘’이라니, 육체파 여배우가 사람의 눈을 홀리는 비결에 관한 책인가. 아니다. 표지 사진은 더 어리둥절하다. 낮은 담에 걸쳐 앉아 고개를 돌린 채 먼 곳을 보는 여자는 우리가 아는 글래머가 전혀 아니다. 접어 올린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손등에 모인 빛이 그려내는 미묘한 음영이 무언가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 마음이다.

저자도 이 단어를 설명하기가 난감했나 보다. 글래머란 무엇인가, 정의하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글래머는 아름다움이나 멋들어짐, 호화로움, 명성, 성적 매력과 동의어가 아니다. 패션이나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글래머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 이미지와 개념, 상징을 통해 작용하고 설득한다는 점에서 ‘비언어적 수사학’이다.” 여기서 핵심은 ‘비언어적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말로 설득하지만 글래머는 이미지로 현혹한다는 점에서 비언어적 수사학,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것은 사물을 실제보다 좋아 보이게 하는 ’마법의 빛‘이다.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이되,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생멸을 거듭하며 진화한다는 점에서 글래머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글래머는 본래 스코틀랜드에서 옛날부터 마법의 힘을 가리켜 쓰던 말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19세기 초 낭만주의 소설가 월터 스콧이 쓰면서 영국 전역에 퍼졌다. 1805년 스콧이 쓴 글에 따르면 글래머는 ‘풋내기를 기사로 보이게 하고/ 지하 감옥의 벽에 늘어진 거미줄이/ 대저택의 연회장에 걸린 벽걸이 자수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다. 이 ‘마법의 콩깍지’의 본질과 작동방식, 효과, 현상, 역사를 파악하려는 치밀한 탐구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전쟁의 글래머, 종교의 글래머, 주식시장의 글래머, 정치의 글래머, 심지어 테러의 글래머도 있다. 이슬람 신성모독으로 찍혀 살해 위협을 받은 소설가 살만 루시디는 2006년 독일 신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하는 사람들의 동기로 그릇된 사명의식, 군중심리, 영웅심, 폭력 미화와 함께 글래머를 꼽았다. 일종의 죽음에 대한 매혹, 실제로는 무의미하게 자신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동을 하면서도 상상력에 이끌려 훌륭한 영웅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군인 모집 광고에 등장하는 반듯하고 멋진 군인은 남성적 글래머의 아이콘이다. 군인을 용맹과 충정, 절제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이런 광고에는 전장의 피비린내가 빠져 있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글래머라는 마법은 환상, 기만, 속임수를 거느리고 있지만, 상상력은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인 힘으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내전과 기아로 부모를 잃은 아프리카 소녀에서 세계적 발레리나로 성장한 미켈라 드프린스는 고아원에 살던 네 살 때 우연히 서양 잡지에서 본 발레리나 사진에서 꿈의 엔진을 얻었다.

글래머가 덧씌워진 건축. 줄리어스 슐만의 사진은 실제보다 훨씬 강렬하고 생생한 느낌으로 건축물의 특징을 포착함으로써 건축의 글래머를 보여준다. ⓒJ.Paul Getty Trust
글래머가 덧씌워진 건축. 줄리어스 슐만의 사진은 실제보다 훨씬 강렬하고 생생한 느낌으로 건축물의 특징을 포착함으로써 건축의 글래머를 보여준다. ⓒJ.Paul Getty Trust

글래머는 대중을 설득해서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가들에게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기도 하다. 독재자 무솔리니는 린드버그의 인류 최초 대서양 횡단 비행 이후 젊음과 패기, 용맹, 성적 매력과 진보의 상징으로 떠오른 조종사의 글래머를 이용했다. 직접 조종술을 배웠고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항공술과 연결했다. 1936년 나온 전기에서도 그는 ‘조종사 무솔리니’로 묘사되었다. 파시스트 청년 잡지 ‘지오벤투 파시스타’ 표지에 연속으로 실렸던 고속 질주하는 자동차의 이미지는 파시스트당을 이탈리아 미래를 이끌어 갈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세력으로 표현하는 전략이었다. “글래머의 황금기는 곧 정치 선동의 황금기였고, 글래머가 정치 선동에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저자의 지적은 선동이 판치는 오늘의 정치에 대입해도 꽤 쓸모가 있을 것 같다.

선글래스, 비행기, 활보하는 여성. 20세기에 글래머를 내뿜던 스타일과 배경 가운데 다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Walter Chin / Trunck Archive
선글래스, 비행기, 활보하는 여성. 20세기에 글래머를 내뿜던 스타일과 배경 가운데 다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Walter Chin / Trunck Archive

욕망을 깨우고 변신을 약속하는 글래머의 힘은 무엇이든 팔 수 있는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기도 하다. 화장품, 자동차, 비행기, 아파트 등의 광고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저렇게 살고 싶다는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 골몰한다. 화장품 모델의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나 지저분한 전선 줄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말끔하고 세련된 사무실, 발목을 혹사시킬 게 분명한 근사한 곡선의 킬힐은 눈에 거슬리거나 불편해할 만한 것들을 감춘 이미지이지만,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매혹 당하는 게 사람 심리이기 때문이다. 글래머는 비상과 도피, 변신의 꿈을 자극하고, 품위라는 환상과 신비감을 일으켜 사람을 움직인다.

저자는 글래머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사례를 동원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스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르네상스 회화부터 앤디 워홀의 20세기 팝아트까지 문학, 예술, 대중음악, 영화, 패션, 정치, 전쟁, 종교와 전쟁 등 글래머가 작동하는 영역을 조사하는 그의 탐침봉은 거의 전방위에 걸쳐 있다. 설명하기 힘든 모호한 개념을 이토록 치밀하게 분석해 윤곽을 잡아내고 세부를 묘사하는 솜씨는 보기 드문 것이다. ‘마법의 빛’ 글래머의 진실을 알고 싶다면, 혹은 그 힘을 활용하고 싶다면, 일독할 만하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m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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