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라면의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소설가 김훈은 신간 ‘라면을 끓이며’에서 라면에 끌리는 이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인과 라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반세기가 넘도록 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라면의 문화적 가치를 3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라면은 맛있다. 인스턴트 라면 한 봉지와 물, 냄비와 불만 있으면 어디서든 환상적인 결과물을 내놓는다. 노란 면과 붉은 국물의 조화는 시각,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청각, 매콤하면서 구수한 냄새는 후각, 쫄깃한 면발은 입술의 촉각, 얼큰한 국물은 미각. 오감을 완벽하게 매료시킨다.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각별하다. 세계인스턴트라면협회(WINA:World Instant Noodles Association)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전세계 라면 소비국 상위 15개국을 조사한 결과 2013년 기준 한국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74.1개로 전체 1위다. 2위인 베트남(60.3개)보다 약 14개나 더 먹는다. 한국인이 닷새에 한 번 꼴로 찾는 라면은 어떻게 식탁에 오르게 됐을까.
●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라면은 195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대만 출신 귀화 일본인으로 닛신식품을 설립한 故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회장이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일본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라멘’을 개발했다. 영감은 중국으로부터 얻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닭과 돼지 뼈 등을 우려낸 국수인 ‘납면(拉麵·손으로 늘여서 만든 국수라는 뜻)’을 만들어 먹었는데, 납면을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라멘’이 된다. 이를 현대식으로 바꾼 게 인스턴트 라면이다.
인스턴트 라면의 탄생은 ‘식품 혁명’이었다. 닛신의 첫 라면은 양념이 된 국수 면발에 물을 붓는 방식이었는데, 쌀과 밀이 없어도 훌륭한 한끼가 차려졌다. 1961년 일본 묘조식품이 라면을 장기간 보관하고 유통할 수 있는 법을 고안해 현재와 같은 분말 스프 형태가 일반화됐다. 뉴욕타임스는 ‘라면왕’으로 불리던 안도 회장이 2007년 세상을 떠나자 “라면을 끓일 물만 있으면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을 수 있다지만, 인스턴트 라면을 주면 그 무엇도 가르쳐줄 필요 없이 평생 먹을 수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쌀 대신 라면… 배고픔을 달래다
한국 1호 라면은 삼양식품의 ‘삼양라면’이다. 삼양식품의 故 전중윤 회장이 “많은 사람의 배를 채워줄 값싼 라면을 개발해야겠다”며 일본의 묘조식품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1963년 출시했다. 첫 출시된 닭고기 맛 삼양라면 1개의 가격은 10원. 김치찌개 한 그릇이 30원, 꿀꿀이 죽이 5원 가량이던 시절이니 10원에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이었다. 하지만 밥과 국에 익숙한 사람들은 밀가루로 만든 인스턴트 식품을 생소해했고, 라면의 ‘면’을 섬유나 실로 오해했다. 삼양식품 직원들은 거리에 나가 시식을 권하며 라면 알리기에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은 ‘국민 음식’ 대열에 올랐다. 박정희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 영향이다. 당시 정부는 라면이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대체제로 봤다. 라면엔 ‘분식의 총아’ ‘식량난해결의 역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삼양라면은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출시 6년 만에 매출액이 300배 이상 신장했고, 농심 ·팔도 ·오뚜기 등 후발주자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1967년 6월 3일 이범순 국립공업연구소장의 ‘매일경제’ 기고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소장은 “3년 전 딸 아이가 결혼해 많은 손님이 예식장을 찾아왔을 때 답례품을 ‘삼양라면’으로 한 일이 있다”며 “어떤 이는 혹시 욕을 하였을지 몰라도 결혼식에 국수가 빠질 수 없다는 우리 고유의 관례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는 그때부터 라면 애용자가 된 셈”이라며 라면 이용을 적극 권장했다.
● 한국 라면, 매운맛을 보여주다
라면은 중국의 요리법에 착안해 일본에서 시작됐지만, 한국에서 진화했다. ‘매운맛’을 강조하는 한국형 라면은 반세기 동안 발전을 거듭해왔다. 1960년대 라면이 첫 출시될 당시는 닭 육수가 중심이었다. 1970년대 들어 한국인의 입맛에 맞춘 소고기 육수를 사용한 라면들이 개발됐다. 이후 된장과 간장 등 장류를 이용한 라면들이 출시됐지만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그러던 중 농심이 1986년 내놓은 ‘신라면’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을 내세워 단숨에 라면시장을 점령했다.
한국형 라면의 진가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88서울올림픽이다. 특히 컵라면은 간편함과 감칠맛을 내세워 외국인의 입맛도 사로잡았다. 당시 농심의 주력상품인 육개장 사발면의 경우 하루 23만개(약 7,000만원)가 팔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 NBC방송은 선수촌 매점에서 팔리는 컵라면을 두고 “미국의 햄버거에 필적하는 인스턴트 식품”이라 평했다.
매운맛 라면의 인기는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굳건하다. 1989년 삼양식품이 라면을 공업용으로 수입한 소기름으로 튀겼다는 이른바‘우지파동’(1997년 대법원서 무죄) 이후 라면의 유해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소비자들의 불신이 커지자 라면업계는 꾸준히 변신을 도모하며 다양한 제품들을 내놨다. 머그면(농심), 쇼킹면(팔도), 채식면(오뚜기), 케찹라면(팔도), 매운콩라면(빙그레), 쌀라면(농심), 신라면 블랙(농심)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수많은 제품들이 ‘원로’ 매운맛 라면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라면업계 관계자는 이를 “한국인의 기호식품 소비습관이 보수적이라는 의미”라 해석했다. 우리가 단순히 ‘라면의 맛’을 고려해 구매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결국 라면의 인이 정서에 박힌 셈이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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