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형님들한테 듣기만 했습니다. 첫 인연은 1978년에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독서회가 출발한 것은 1981년부터죠. 지금은 영등포 평생학습관에서 만나지만, 그전에는 구로도서관에서 스무 해 동안 함께했고,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시흥의 헌책방 ‘씨앗글방’ 뒤쪽의 골방에서 같이 읽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씨앗독서회였습니다.”
기억의 샛길을 더듬느라 정화양씨의 목소리가 아련하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수줍고 쑥스럽게 입술이 세월을 탄다. 상록독서회는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독서공동체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 1970년대 말 시흥의 달동네 한 야학에 다녔던 청년들이 모여서 시작했다. 요즘처럼 배움이 흔하지 않을 때, 야학은 집안사정 탓에 배움을 얻거나 계속하지 못한 이들이 어울려 배우던 시민 자율의 학교였다. 선생님은 주로 대학생들이 많았다. 시간을 쪼개고 노력을 더해서 자신이 아는 바를 기꺼이 공유했다.
“서점 뒷방을 내어준 장동식 형님 덕분에 1984년부터 모임에 나왔습니다. 형님은 낮에는 책방을 열고 밤에는 노점을 벌여 책을 팔았습니다. 새 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라, 저 역시 하굣길에 노점 책방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어느 날 불쑥 말하더군요. 대학교 들어가면 같이 책을 읽자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공동체
세상을 생각하면 울분이 넘치고 앞날을 떠올리면 암울하기만 한 군사독재 시대였다. 출세가 일종의 굴복이자 오욕이 될 때, 사람들은 내면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려 한다. 문학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룩해 현실의 비참을 들추어내고 인간적 삶의 가치를 고양하며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구를 제안한다. 문학에 대한 지극한 애호가 일어나면서 동네마다 문학청년이 넘쳐나고, 자연스레 문학을 읽고 이야기하는 열광이 솟구친다. 1980년대가 ‘시의 시대’라 불리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다. 상록독서회에 모인 이들도 문학을 참 좋아해서 즐겨 읽었다. 등단해서 정식으로 작품을 발표한 이들도 신현배, 박혜숙, 백건우 등 여럿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과 지역 출신 청소년이 모여서 책을 읽었습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태백산맥’ 등 시대 배경을 고려한 작품들이야 당연히 읽었지만, 모임에 특별한 방향은 없었습니다. 1985년 이후 현장으로 들어온 이른바 ‘의식화 팀’과 운영을 놓고 잦은 충돌이 있었던 것도 벌써 까마득하네요.”
헌책방을 나와 상록독서회는 시흥동 복지회관에 처음으로 독립 공간을 마련했다. 창고에 딸린 좁고 허름한 공간이었지만, 회원들이 책을 추렴해 수백 권을 마련한 후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대출을 시작했다. 독서 모임을 꾸준히 진행하는 한편으로 가난한 이웃들한테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는 마을문고를 시작한 것이다. 이 일에는 처음부터 참여해 함께 책을 읽고, 세상의 온갖 외풍을 든든히 막아준 고 김영록 선생의 도움이 있었다. 초기 상록독서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영록 선생은 장준하의 고향 한 해 후배였는데, ‘사상계’편집위원으로,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대들보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면서 모임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중심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35년간 열린 모임 1,000여명 거쳐
서른 다섯 해 동안 존속하면서 아무 조건 없이 모임을 개방했기에 상록독서회를 거쳐 간 시민은 무려 1,000여명에 이른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 자체로 세계를 하나씩 품고 있어, 무한한 다양성을 연출하는 책과도 같았다.
“저희는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와서 누구든지 참여하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원칙으로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야학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나 책을 읽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심지어 책을 읽고 오지 않는 경우에도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목사, 스님, 기인 등 이른바 세속을 멀리한 분들도 불쑥 찾아오곤 했습니다.”
책은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서 때때로 종교를 넘어서고, 한 사회를 바꾸는 일에서 때때로 정치를 능가한다. 책을 읽는 것은 타자의 혀로 자신을 고백하는 행위다. 마음의 닫힌 문을 두드려 열고, 생각의 굳은 근육을 주물러 푸는 작업이다. 일찍이 이성복은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리지 못하고”라고 읊은 바 있다. 절망은 왼손이 왼손만 있다고 여길 때, 기꺼이 내밀어 오른손을 부르지 못할 때 생긴다. 희망은 삶에서 사랑의 형식을 발명할 때, 즉 하나에서 둘로 가는 방법을 발굴할 때 비로소 우리를 찾아온다. 읽기는 더 없는 은밀함과 친밀함 속에서 타자를 환대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혁명하는 힘을 촉발한다.
“모임은 우선 저를 구원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 뛰어들었지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상처만 입었습니다. 언뜻 보면 세상이 좋아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나빠졌습니다. 사람을 바꾸는 일 없이는 어떤 변화도, 김수영의 표현처럼, ‘방만 바꾸는’ 꼴이 됩니다. 목적도 없이 방황하면서 자아를 잃은 채 시들어갈 때 오직 책만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눔으로써 천지간에 홀로 떨어진 듯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저를 찾을 수 있었죠.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 ‘자기 객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 계획 동서양 고전 읽기 6년째
오랫동안 세월을 같이한 모임들은 어쩔 수 없이 친목으로 흐르기 쉽다. 독서공동체 역시 다를 리 없다. 온갖 책을 읽고 말을 섞으면서 서로 깊은 곳을 수없이 들여다보았기에 사이는 보석처럼 단단해지지만, 지나친 관용이 스며들면서 모임이 본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저절로 느슨해진다. 좋은 반복을 무한히 만들어내는 일은 그만큼이나 힘들다. 서른네 해 동안 같이 책을 읽어오면서 상록독서회 역시 해산의 위기를 끝없이 겪었다.
“아마 책을 읽고 하는 토론이라면 지금껏 저희가 대부분 해봤을 겁니다. 어떤 것이 가장 좋은 형태라고 할 수는 없지요.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요즘은 매달 첫째 주 일요일 오후에 모이는데, 주제를 정한 후 각자 필요한 책을 읽고 와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형태로 진행 중입니다. 이번 주제는 ‘우월감과 열등감’입니다.”
시간이 흐르자 한 사람씩 모임 장소로 들어선다. 상록독서회에서 분기된 고전 독서모임 네오아카데미 회원들이다. 이 모임은 여섯 해 전인 2009년에 생겨났다. 책 읽고 친목 나누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따로 소모임을 꾸렸다. 10년에 걸쳐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주요 고전을 엄선한 후 같이 읽어나가기로 서약했다. 한 달에 세 차례씩 서로 발제를 돌리면서 책을 반드시 읽고 와서 깊이 토론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이쪽이 더 활발하다.
“첫 책으로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이야기할 때가 생각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형태로만 만났지 다들 진짜 원전을 읽은 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표현이 너무 끔찍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잔혹한 묘사를 한 이유를 놓고서 말들이 아주 풍성했습니다.”
호메로스적 세계의 잔혹은 신들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무정한 운명들의 진릿값에 대한 영웅적 확신에서 비롯한다. ‘일리아드’는 신의 뜻의 옳음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전혀 의심하지 않기에 친딸을 항해의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은 잔혹한 짓조차도 서슴없이 행할 수 있는 영웅들의 전쟁을 그려낸다. 오직 신의 뜻만을 좇아 필멸의 비루함을 불멸의 찬란함으로 바꾸려 분투하는 인간들의 탁월함을 호메로스는 찬양한다. 전투의 패배자는 있어도 인생의 패배자는 없는 온전한 세계가 서양인들이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리스적 황금시대다.
호메로스를 읽는 것은 그 금빛으로 빛나는 세계를 자기 영혼 속으로 초대함으로써 생의 온전함을 꾸미는 일이기도 하다. 영혼이 환히 밝아지는 듯한 극적 체험. 고전은 그 맑고 밝은 세계를 계속 맛보려는 지속적 갈증을 빚어낸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밀턴의 ‘실낙원’, 단테의 ‘신곡’을 거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묵직한 서양고전들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었던 힘은 거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네오아카데미의 정미연씨가 말한다.
“책은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사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생각에 일종의 편향 같은 것이 생깁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하고만 있다 보면 생각조차 비슷해집니다. 터줏대감 의식 같은 게 일어나죠.”
그러면 인간됨은 고루해지고 생활은 푸석해져서 삶 전체가 건강을 잃어버린다. 일상의 무미건조함이 밀려들면서 살아도 죽은 것 같은 좀비의 삶이 계속되는 것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좀비들이 자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거기에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마주친다. 책을 읽는 것은 자기 내면의 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소중한 도구다. ‘다른 얼굴’의 가능성을 환기하고 ‘다른 삶’의 존재를 제안함으로써 책은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 폭발과 균열을 만들어낸다. 문희정씨가 말한다.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내 안에서 생각의 폭발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내 안에 있으리라고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나’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같이 읽기’는 억눌렸던 나를 찾아 내면의 지층을 파고드는 일과도 같습니다.”
일요일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모임을 재촉한다. 네오아카데미는 카를 융의 ‘원형과 무의식’을 막 끝냈다. 올해까지 서양 주요 고전을 모두 끝내고, 서약한 대로 내년에는 동양고전으로 옮겨갈 생각이다. 도장을 찍듯이 마지막으로 김은정씨가 말한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게 좋지만 독서는 같이하는 게 좋아요. 더 지속적으로, 더 힘 있게 할 수 있으니까요.”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상록독서회 네오아카데미가 권하는 서양 고전들
고전에 입문하려는 이들한테 몽테뉴의 ‘수상록’을 먼저 읽으면 어떨까 하고 권하고 싶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면서 진리를 추구해 갔던 한 노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삶을 위협하는 죽음마저도 철저히 사유함으로써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했던 몽테뉴의 사상적 진지함과 인간적 나약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어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한국일보ㆍ책읽는사회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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