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 슬기롭고 옹골차다는 뜻으로 우리말 ‘슬옹’으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말씀을 드렸다가, 아버지 손이 이렇게 날아왔어요. 불호령이 떨어졌죠. 그래도 한글로 명찰을 바꿔 달고 학교에 갔어요.”
김슬옹(53) 워싱턴 글로벌 유니버시티 교수는 유별난 한글사랑으로 국내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훈민정음 연구자다. 숱한 저서와 강연으로 우리 글자뿐 아니라 우리말 사랑을 강조해왔고, 전국대학생국어운동연합회장으로 ‘서클’을 ‘동아리’로 바꿔 부르는 운동에 앞장선 장본인이며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글 관련 안내문의 작성도 도맡는 인물이다.
그는 이달 초 한글날을 맞아 간송미술문화재단과 교보문고가 569년 만에 복간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의 복간 고증과 해설서 집필을 맡아 연구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또 최근 역대 훈민정음 연구사에 등장한 연구문헌을 총 정리한 ‘훈민정음(언문ㆍ한글) 논저 자료 문헌 목록’(역락)도 완성했다. 김 교수는 이번 복간본이 나오고 그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고 했다. “제가 국내 40개 대학 임용에서 탈락했잖아요. 이번 복간본이 나오고 감격스러워 얼마나 울었는지 작은 눈이 더 작아졌어요.” 13일 그가 연구위원으로 있는 한글학회 사무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그는 “많은 후학들과 대중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훈민정음의 가치와 이후 문헌 발견의 역사적 맥락 등을 거시적으로 철저히 조망했다”고 설명했다. 새로 나온 훈민정음 해례본 해설서 ‘한글의 탄생과 역사’는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과 역사, 반포 이후 발전 과정 ▦해례본의 구조, 발견과정, 평가 ▦국문 및 영문 번역 전문 등을 망라했다.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배워 중고교 때는 ‘한자박사’로 통했다는 그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 말 존중의 근본 뜻’을 읽은 것을 계기로 한국어와 한글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름도 김용성에서 김슬옹으로 바꿨다. 한자 명찰 시대에 홀로 한글 명찰을 달고 등교하던 그는 대학교 2학년 때는 법적으로도 개명했다.
“개인 사정으로 연세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만 하고 학위를 못했어요. 학계에 대한 환멸 때문에 국어학에 손을 놓고 프랑스철학을 공부하다 편입한 다른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이런 이력 때문인지 정교수나 전임교수 임용에서 계속 고배를 마셨어요.”
이후 최근 5년간 각종 면접에서 그가 얼굴을 붉힌 이유는 영어 면접 때문이다. 김 교수는 “3년 전 한 대학에서 중세국어 전공자를 전임교수로 뽑는 면접에 갔는데 외국인 교수가 앉아 ‘집이 어디냐’등을 영어로 묻더라”며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아임 쏘리!(I’m sorry)를 외치고 나온 것이 제가 본 마지막 면접”이라고 했다.
그는 올 초부터 워싱턴 글로벌 유니버시티 한국어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순훈 전 배재대 총장이 “세계에 한국어, 한국학, 한국어교육 등의 가치를 전하겠다”는 취지로 올해 워싱턴DC의 인가를 받아 문을 연 사이버대학교다. 이번 학기 세종학과 한글학 등 2과목을 맡았다.
그는 내년쯤 음악, 과학, 철학, 국어학, 수학 등 다양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세종의 업적을 연구하는 ‘세종융합학회’도 세운다는 계획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자이기 이전에 훌륭한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 사상가였죠. 음양오행, 천지인의 조화 등 동양사상은 물론 가장 중요한 민본사상을 펼쳤으니까요. 이런 부분에 대한 융합학제적 연구가 강화돼야 합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하고 이를 세계 학생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죠.”
글ㆍ사진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