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은 토요타, 혼다와 함께 일본 3대 완성차 업체 중 하나이지만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습니다. 르노삼성자동차처럼 1990년대 말 파산 위기를 겪으며 프랑스 르노로 대주주가 바뀌는 시련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연간 판매량 약 800만대 중 60%(지난해 기준)를 닛산 모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노 순이익의 약 80%를 벌어들일 만큼 닛산은 글로벌 시장에서 완벽히 부활했습니다.
다른 수입차 브랜드에 비해 닛산은 국내 시장 진출이 늦은 편입니다. 2004년 2월 한국닛산을 설립했고 4년 뒤 2008년 11월 닛산 브랜드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전체 라인업이 60여 종이지만 국내 판매 중인 차는 중형 세단 ‘알티마’,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캐시카이’, 7인승 SUV ‘패스파인더’, 전기자동차 ‘리프’ 등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이런 닛산에서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파문이 자동차 업계를 강타한 이달 초 최상위 모델 ‘맥시마’를 국내 출시했습니다. 3.5ℓ 가솔린 엔진 차입니다. 출시 타이밍이 참 절묘합니다.
1981년 글로벌 시장에 데뷔한 맥시마는 국내 판매가 처음이지만 4세대(1995~1999년) 모델은 삼성자동차의 1세대 SM5 원형입니다. SM5는 전성기 시절 월 1만대 판매를 돌파하며 ‘국민 중형차’ 쏘나타를 위협한 무시무시한 차량입니다. 그만큼 한국 소비자에게 먹힐 만한 잠재력을 가졌습니다.
국내에 처음 도전장을 던진 맥시마는 닛산의 미국 테네시주 스미나 공장에서 생산된 8세대 모델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 출시입니다. 트림도 최고급 사양을 갖춘 플래티넘 한가지뿐입니다. ‘수입차 춘추전국 시대’인 한국에서 제대로 승부를 해보겠다는 닛산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지난 13일 인천 영종도에서 만난 맥시마의 외형은 작년 초 ‘북미오토쇼’(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콘셉트카와 거의 같습니다. ‘스포츠 세단’이란 수식어에 맞게 전장이 7세대에 비해 54㎜ 늘어났고 전고는 30㎜ 낮아져 스포티하고 날렵했습니다.
닛산의 디자인 철학 ‘에너제틱 플로우(Energetic Flow)’가 적용된 전면의 ‘브이(V) 모션 그릴’은 다소 파격적입니다. 지난해 SUV 무라노에 처음 시도된 이 그릴은 앞으로 닛산 차 패밀리룩으로 자리 잡을 모양입니다.
측면에 적용된 ‘플로팅 루프(Floating Roof)’ 디자인도 독특합니다. AㆍBㆍC 필러를 모두 검정색으로 처리해 마치 지붕만 붕 떠 있는 듯합니다.
부메랑처럼 생긴 리어 램프가 달린 후면 디자인은 그나마 무난한 편입니다. 듀얼 머플러가 역동성을 풍기지만 전체적으로는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내부는 운전석 쪽으로 7도 기울어진 센터페시아와 직관성을 높인 각종 버튼들, 고속 주행시 일체감을 높이는 버킷 시트, 스포티함을 강조한 D컷 스티어링 휠 등 운전자를 배려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마호가니 우드 트림과 수작업 같은 스티칭 등 내장재 마감도 꼼꼼합니다. 다만 파킹 브레이크가 전자식이 아닌 풋 브레이크이고, 국산 준중형 아반떼에도 옵션으로 넣을 수 있는 오토홀드 기능이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스포츠 세단을 지향한 디자인 때문에 실내도 넓지 않습니다. 전장은 동급 차량과 비슷하지만 실내공간을 좌우하는 휠베이스(축간거리)가 2,775㎜로 짧기 때문입니다. 배기량 레인지가 비슷한 현대자동차 제네시스(3.3ℓ)의 휠베이스는 3,010㎜, 한국지엠(GM)의 임팔라(3.6ℓ)는 2,835㎜입니다. 플래그십 세단이란 포지션에 어울리지 않게 뒷좌석 공간감은 국산 중형 세단 수준입니다.
최대출력 303마력을 발휘하는 3.5ℓ 병렬 가솔린 엔진이 선사하는 주행성능은 시원시원했습니다. 무단변속기 기술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닛산의 차세대 엑스트로닉 CVT가 조합돼 충격 없는 부드러운 변속과 역동적인 가속이 이뤄졌습니다. 가속 페달을 밟을수록 날카로워지는 배기음도 정통 스포츠카 못지 않았고, 곡선 구간에서 단단하게 잡아주는 앞뒤 서스펜션의 조화와 강성도 뛰어났습니다.
스포츠 모드와 일반 주행 모드의 차이도 선명했습니다. 스포츠 모드에서는 가속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분당 엔진 회전수(RPM)가 5,000 이상으로 치솟았습니다. 체감상 일반 주행 때보다 RPM이 배는 높아지는 듯 했습니다. 엔진은 그만큼 더 강하고 신속하게 반응했고, 차체에는 빠르게 속도가 붙었습니다.
영종도 일대 약 120㎞를 주행한 뒤 측정한 연비는 공인 복합연비(9.8㎞/ℓ)에 못 미치는 7.9㎞/ℓ였습니다. 간간이 고속 주행을 했지만 도로 정체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 연비는 높지 않아 보입니다.
맥시마는 과감한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고 배기량 가솔린 엔진의 넉넉한 퍼포먼스를 원하는 이들은 선호할 만한 차입니다. 풀 옵션을 갖춘 단일 트림의 가격이 부가가치세 포함 4,370만원이고 옵션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경쟁력입니다. 비슷한 수준의 웬만한 국산차도 고사양 옵션을 추가하면 이보다 비싸집니다. “브랜드 위상을 높이기 위해 맥시마를 출시했다”는 타케히코 키쿠치 한국닛산 대표의 바람은 어느 정도 실현될 것 같습니다.
디젤차의 아성이 한순간에 허물어진 것도 맥시마의 어깨를 한결 가볍게 했습니다. 이 같은 출시 타이밍은 닛산의 전략이라기보다는 우연의 일치입니다.
수입차 한대를 들여오려면 연간 계획을 세운 뒤 본사 협의와 물량을 확보하고 국내 안전성 검사와 연비 인증, 마케팅 준비 등을 위해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합니다. 닛산도 지난해 말 맥시마 출시 계획을 세웠고, 폭스바겐 사태가 터지기 한달 전인 올해 8월말부터 사전계약에 돌입했습니다. 한국닛산 측은 “디젤차를 들여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올해 말까지 한국닛산이 계획한 맥시마 150대는 최근 완판됐습니다. 폭스바겐 사태가 터지기 전에 목표를 소심하게 잡은 겁니다. 한달 전까지도 디젤 세단이 초강세인 국내에서 가솔린, 그것도 연비가 높지 않은 고배기량 세단을 내놓는 부담이 상당했을 겁니다. 게다가 맥시마는 한국닛산의 올해 유일한 신차라 실패할 경우 상처가 꽤 컸을 겁니다.
이제 한국닛산은 맥시마를 추가로 확보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계약은 계속 받고 있지만 추가 물량은 본사 및 미국 공장과 협의해도 몇 달은 걸릴 듯 합니다. 모든 상품이 그렇지만 자동차도 팔 수 있을 때 최대한 팔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닛산의 예상하지 못했던 고민도 커지고 있습니다. 폭스바겐 사태가 보여줬듯이 몇 달 뒤에는 자동차 시장이 또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려우니까요.
글ㆍ사진=김창훈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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