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옷이 패션의 영역으로 들어온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홍대 등지엔 브로치만큼 큰 단추가 달린 블라우스, 기계주름이 따박따박 잡힌 플레어 스커트 등 할머니 옷장에서 훔친 듯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들의 괴랄한 옷차림이 ‘빈티지 패션’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승격한 건, 90년대 알렉사 청, 클로에 세비니, 율리아나 세르젠코 같은 외국 패션 아이콘들의 탁월한 코디네이션 능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구제의 매력을 알게 된 청년들은 이제 홍대를 벗어나 구제 옷의 본고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종로 광장시장, 고속터미널 지하상가, 그리고 어르신들의 홈그라운드인 동묘 앞 벼룩시장까지. 헌 옷 입는 걸 흉으로 생각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장터에, 헌 옷에 부가가치를 매기는 세대가 고객으로 등장한 것이다. 온라인 시장도 급부상해 현재 포털 사이트에서 구제 패션을 검색하면 수십 개의 쇼핑몰이 나온다. ‘셀렉트’와 ‘디스플레이’의 개념이 전무한 구제시장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마켓도 수백~수천 벌의 옷을 엄선의 과정 없이 웹 상에 ‘널어’ 놓는다. 여기엔 한 벌의 셔츠를 사기 위해 100벌의 셔츠를 일일이 클릭하고 그러고도 맞는 사이즈가 없어 발길을 돌리는 구제 마니아들이 득실거린다. 이들은 왜 헌 옷에 열광할까.
대학생 박슬기(24)씨는 옷장의 절반 정도가 구제 옷이다. 학창시절부터 인터넷으로 중고 옷을 사고 팔았던 경험 때문에 남이 입었던 옷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그가 말하는 구제 옷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싸다는 것. 지난 몇 년간 유니클로, H&M, 자라 등 해외 SPA(제조?유통일괄의류) 브랜드가 저렴함을 무기로 줄줄이 국내에 진출했지만 구제 시장 옷과는 단위부터 다르다. “10만원을 들고 SPA 브랜드 매장에 가면 겉옷 하나 사기도 힘들지만 동묘에 가면 두꺼운 겨울 코트와 니트, 원피스, 신발을 사고도 한참 남아요. 온라인 오픈마켓에서도 5,000~6,000원짜리 옷을 팔지만 그건 딱 제 값을 하거든요. 너무 흔하기도 하고요.”
흔히 빈티지에 빠지는 계기는 이처럼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가격 때문이다. 동묘에서 3,000~5,000원을 부르는 옷들 중엔 보세 옷부터 한때 백화점에서 팔리던 옷까지 다양하게 구비돼 있어 잘하면 횡재를 할 수 있다. 지방시, 이브생로랑, 버버리 같은 소위 명품 옷을 4만~5만원에 건지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구제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질 좋고 저렴한 것만이 구제의 매력은 아니다. 황민건(24)씨는 중고 시장을 찾는 이유를 “기존 기성복에서 볼 수 없는 디자인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제 시장은 한 가지 스타일만 팔지 않아요. 90년대 힙합 스타일부터 요즘 유행하는 패션까지 전부 있죠. 심지어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흘러 들어온 옷들이라 디자인이 정말 다양해요.”
하나의 스타일이 부상하면 동대문과 온라인 오픈마켓, 심지어 백화점까지 똑 같은 옷들로 도배되는 대한민국에서 구제 옷의 경쟁력은 독보적이다. 유행의 경박한 주기에 질린 이들은 시공을 초월한 구제시장에서 자기 스타일을 발견하는 일을 수고로 여기지 않는다.
“처음 구제시장에 갔을 땐 뭐 이런 곳에서 옷을 사나 싶었다”는 황씨는 몇 번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한 후엔 보물찾기 하듯 쇼핑한다고 말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비율이 적긴 하지만, 구제 시장엔 종종 황씨 또래의 젊은 남자들이 눈에 띈다. 빨간 페도라에 긴 가죽 코트를 입은 모델 같은 남자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헌 옷 더미에 열중해 있는 모습은 동묘에서 그리 드물지 않은 풍경이다.
“SPA 브랜드들은 그때그때 트렌드에 반응해서 옷을 만들기 때문에 서로 브랜드 이름만 다르지 옷은 거의 비슷해요. 브랜드는 많아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옷 종류는 줄어든 거죠. 그래서 전 흰 티셔츠 같은 기본 아이템은 SPA 브랜드에서 구입하고 개성 있는 옷을 사고 싶을 땐 구제 시장으로 가요.”
구제 패션은 친환경 트렌드와 맞물리며 ‘착한 패션’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창 SPA 브랜드들이 쏟아져나올 때 일각에선 지나치게 높은 소비 회전율을 우려하며 “잠깐 입고 버리는 옷들이 지구를 위협한다”고 경고했다. 지구에 얼만큼 이롭냐를 따질 때 구제 옷은 가장 정의로운 축에 속한다. 구제 마니아들 중엔 이를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지만 어떤 이들은 소신으로 여기기도 한다. 직장인 류민경(32)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류 제작에 쓰이는 염료가 환경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며 “환경을 위해 채식을 하는 것처럼 의생활의 일부를 중고 옷으로 대체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빈티지의 가장 큰 선물은 느림, 여유, 이완 같은 가치를 삶 속에 직접 침투시킨다는 것이다. 헤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빈티지 쇼핑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오래된 옷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로움은 공장에서 갓 나와 숨가쁘게 유행을 좇는 요즘 옷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시간을 들여 조리한 음식이 삶의 태도를 바꾼다고 믿는다면, 수십 년을 생존한 옷을 걸칠 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일이다.
박씨는 꼭 쇼핑 목적이 아니라도 가끔 구제시장에 들러 옷들을 구경하곤 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들을 보다 보면 이 옷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궁금해져요. 그럴 때마다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옷의 이야기를 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구제 옷 쇼핑, 어떻게 하면 똑똑하게 할까?
초보자들을 위한 구제 쇼핑 팁
구제 쇼핑은 난이도로 치면 최상급이다. 상품을 돋보이게 하려고 깨끗이 다림질해 밝은 조명 아래 걸어두는 매장과 달리 산더미처럼 쌓인 구제시장의 옷들은 얼핏 봐선 누더기나 진배 없다. 여기서 보물을 발견하는 건 순전히 소비자의 몫으로, 어지간한 관록 없이는 구제 쇼핑을 노동으로 느낄 수 밖에 없다. 초보자들을 위해 구제 예찬론자들이 전하는 구제 쇼핑 입문의 팁을 소개한다.
우선 값이 싸다고 덜컥 계산해선 안 된다. 디자인과 색감이 마음에 들어도 막상 집에 와 입었을 때 사라진 단추, 세탁 후 후줄근해진 상태 때문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번거롭더라도 소재부터 단추 상태, 옷 매무새, 세탁법 등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3대가 함께 구제 시장을 애용한다는 한 30대 여성은 “니트에는 구멍이 없는지, 쉬폰 소재의 옷에는 올이 풀린 곳이 없는지 등을 꼼꼼히 확인해서 물건을 고른다”며 “자주 고르다 보면 이런 점은 쉽게 눈에 띈다”고 조언했다.
탈의실이 없는 가게가 대다수지만, 눈치껏 옷을 걸쳐 보는 것도 필수다. 이하련(21)씨는 “구제 옷은 사이즈가 기성복과 달라 웬만하면 입어보고 사는 것이 좋다”며 “왔던 곳을 다시 찾기 어려우므로 입어 봤을 때 이거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사는 과감함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티슈와 마스크를 준비해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박슬기씨는 “종종 좌판에 먼지가 많아 기관지가 좋지 않다면 마스크를 챙겨가고, 장갑 혹은 물티슈를 챙겨가면 찝찝함을 느끼지 않고 옷을 고를 수 있다”고 귀띔했다.
본인의 취향에 맞는 가게 이름을 몇 개 기억해놓고 친분을 쌓아두면 쇼핑이 한결 쉬워진다. 박이순씨는 “상가나 시장 초입에 있는 소매상보다는 시장 깊숙한 곳에서 도매 가격으로 떼어다 파는 가게를 애용한다”며 “한 두벌씩 사는데도 도매가격으로 좋은 품질의 옷을 살 수 있다"고 귀띔했다. 슬기씨는 “좌판에 쌓인 옷들은 매우 저렴하지만 입어보기 힘들고 괜찮은 옷을‘득템’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보자들은 매장 형식의 가게로 가는 것이 좋다”며 “같은 시장 안에서도 가게의 경우 수선과 다림질을 다 해놓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원하는 옷을 찾기가 수월하다”고 조언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규희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과 4년)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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