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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된 '전설의 첩자' 마타 하리… 팜므 파탈과 젠더권력의 순교자 사이

입력
2015.10.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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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첩자 ‘마타 하리(Mata Hari,1876~ 1917ㆍ사진)’가 1917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교외 반센느의 가설 처형대에서 섰다.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섰다는 설이 있으나 묶인 몸이었을 테니 아마 낭설일 테다. 눈 가리개를 거부했다는 건 진실일 수 있다. 10월의 투명한 하늘과 햇살이 그는 간절했을 것이다. ‘첩자’라는 것도 사실 누명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 ‘전설’은 빼어나다는 의미의 수사가 아니라 본 뜻 그대로의 전설이 된다.

그는 한 사업가의 딸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 흑발에 갈색 눈, 올리브 빛 피부는 출중한 외모에 이국적인 매력을 더했을 것이다. 13살 무렵 아버지가 파산했고, 부모가 이혼했다. 함께 살던 어머니는 2년 뒤 숨졌고, 15살의 그는 재혼한 아버지 대신 대부였던 피서르(Visser)라는 이와 함께 살게 된다. 유치원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그는 학교장의 음탕한 놀림에 시달리다 학업을 중단했고, 얼마 뒤 헤이그의 삼촌 집으로 다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살에 그는 신부를 구하는 신문 광고를 보고 알게 된 C. 마클레오트라는 스무 살 연상의 인도네시아 주둔군 장교와 결혼한다. 당시의 그에겐 애정이 아니라 안정이 절실했다. 하지만 그는 애정도 안정도 누리지 못했다. 마클레오트는 바람둥이였고, 알코올 중독자였고, 또 폭력적이었다. 후처를 두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 무렵 배우던 인도네시아 전통 춤은 마타 하리에게 큰 낙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리 등지를 오가며 댄서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다. ‘낮의 눈동자’라는 뜻의 ‘마타 하리’는 춤을 추며 얻은 예명이었다. 이혼한 건 1907년이었고, 함께 낳은 두 아들은 남편이 옮긴 매독 감염 후유증으로 잇달아 숨졌다.

한때 이사도라 던컨의 무용팀에서 일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의 명성은 물랭 루주와 고급 살롱의 어두운 무대에서 더 빛을 발했다. 오리엔탈리즘이 승하던 때였다. 이국적 미모와 춤사위를 지닌 그가 자신을 자바계 혼혈로 치장한 것은 연예인이 나이를 속이는 것처럼 사소한 거짓이었을 것이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그는 춤을 췄고, 국적 불문 군인ㆍ정치인 등과 숱한 염문을 뿌렸고, 당연히 돈을 받았다. 다른 파트너의 군사 정보를 얻어달라는 주문과 함께 건네진 돈도 있었다.

그가 독일 (이중)첩자였다는 확증은 없다. 1917년 2월 17일 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뒤 그와 연루된 연합국 진영의 뭇 명사들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데 급급했다. 20여 년 전의 드레퓌스에게는 에밀 졸라가 있었지만, ‘난잡한’ 하리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변호사의 조력조차 받지 못했다. 프랑스 법원은 “마타 하리가 빼돌린 군사 기밀은 연합군 병사 5만 명의 목숨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밝혔지만, 그 산술의 근거 역시 물론 알려진 게 없다.

첩자의 전설이 값싼 전설일 뿐이라면, 마타 하리는 젠더 권력의 순교자라 해야 할지 모른다. 팜므 파탈과 순교자의 아득한 극단 사이에 그의 이름이 떠돌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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