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을 그리지 않으면 험상 궂다. 슬쩍 미소를 띄우면 장난기가 얼굴에 퍼진다. 조각된 얼굴도, 굴곡진 근육도 지니지 않았다. 천상 주연을 도와주는 역할에 머물 외모다. 영화 이력도 겉모습과 얼추 비슷하다. 형수의 몸을 탐하는 짐승 같은 시동생(‘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베트남전 참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전역자(‘인간중독’), 폭력조직의 중간보스(‘빅매치’), 마약중개에 나선 중고차 매장 업주(‘베테랑’) 등 비루한 역할을 주로 맡았다. 대사관 고위 직원(‘집으로 가는 길’)이나 검사(‘의뢰인’)처럼 엘리트로 변신해도 주류로 각인되진 않았다. 정을 주기 힘든 역할들을 도맡아 왔는데 기이하게도 대중들은 배우 배성우에게서 친근함을 느낀다. 그가 전하는 비극성 뒤에서 희극을 읽고, 비정한 몸짓에서 온정을 엿본다.
조연에만 전념하리라 여겨졌던 배성우가 주연급으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실직 뒤 가족을 살해하는 중년 남성(‘오피스’)을 연기하며 스크린 속 활동 공간을 넓히더니 ‘더 폰’으로 상업영화 첫 주연을 맡았다. ‘더 폰’의 개봉(15일)을 앞둔 그를 13일 오후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더 폰’은 상식을 거부하는 스릴러다. 변호사 고동호(손현주)가 1년 전 살해 당한 아내 연수(엄지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출발선에 선다. 과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반신반의하던 동호는 아내와의 통화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범인 찾기에 힘을 쏟는다. 연수를 죽였던 전직 경찰 도재현(배성우)이 완전 범죄를 위해 동호의 목숨을 위협하면서 영화는 서스펜스를 만들어간다.
배성우는 ‘더 폰’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무표정하게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듯 동호를 폭행하고 연수를 죽이려 한다. 배성우는 “스릴러의 악역은 싸이코패스가 대부분인데 재현은 평범한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인에 나서는 기술자 같은 인물이라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위트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동호와 재현 사이의) 긴박한 상황을 연기하기를 (김봉주) 감독님이 원해 전형적으로 인물을 그려냈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 배성우는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재능을 다듬었다. 배성우는 “급여가 차비 정도였지만 다른 연극배우들과 달리 집이 서울이라 먹고 자는 데는 큰 불편이 없던 시절”이라고 대학로 활동기를 회상했다.
“연기에 대한 고민만 많이 했던 시절이다. 당장 내일 (무대에서) 더 잘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했다. (영화 ‘아저씨’의) 김희원, (TV드라마 ‘밀회’의) 박혁권 형과 결론도 없이 밤새서 연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두 형에게 배운 게 많다.”
오랜 조연 생활을 거쳐 이르게 된 주연이니 ‘더 폰’ 촬영 현장의 감회가 남달랐다. 배성우는 “관객을 설득하고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를 (다른 배우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니 연기가 즐거웠다”며 “흥행에 대한 부담이 커지긴 했어도 이제야 영화배우가 된 느낌이 난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끌어가야 된다”는 의욕이 지나쳤을까. 그는 촬영 중에 한 쪽 발목 인대가 거의 끊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액션 연기의 3분의 2 정도가 몰려있는 세트 촬영을 앞두고 입은 부상이라 걱정도 많이 했으나 물리치료 등으로 고통을 이겨내며 간신히 찍었다.”
‘더 폰’으로 주연 자리에 올랐다고 하나 배성우는 여전히 충무로에서 조연 배우로 환대받는다.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 3편(‘특종: 량첸살인기’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부자들’)이 연말까지 개봉한다. ‘특종: 량첸살인기’는 15일 개봉하며 ‘더 폰’과 흥행 맞대결한다. ‘배성우 대 배성우’로 표현될 수 있는 늦가을 흥행싸움이다. 배성우는 “우산 장사와 짚신 장사를 각각 자녀로 둔 엄마의 심정”이라며 “처음엔 ‘날 죽이려고 이러느냐’고 반발도 했는데 즐겁게 받아들이려 한다”고 밝혔다.
배성우의 동생은 아나운서 배성재. “(나에 비하면) 매우 유명하다”는 한마디로 동생을 평한 배성우는 “여느 형제들처럼 말을 많이 나누지는 않는다”면서도 각자 직업에 대한 호기심은 나눈다고 했다. (관련기사 ▶ 배성재 | 눈사람 인터뷰)“동생이 축구 중계할 때 패스를 주고 받는 사람을 어떻게 바로 말할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본다. 경기를 최대한 많이 보고 축구 작전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면 흐름이 보여 즉각 누구에게 패스가 가는지 안다고 그러더라. 동생은 제 영화 보고선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제가 어떤 영화 출연할지는 항상 궁금해 한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고급 정보도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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