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보국 MI-5(국내 정보국) 요원으로 현장과 지휘부에서 일하고 고위직(Assistant Director)으로 은퇴한 피터 라이트(Peter Wright)가 1985년 자서전을 썼다. ‘스파이캐처Spycatcher(사진)’라는 책이다. MI-5에서 그의 주요 임무가 조직 내 소비에트 첩자를 색출하는 거였다고 한다.
책 출간이 순조로웠을 리 없다. 그는 공직자였고, 영국은 1911년 제정된 ‘공무비밀법(Official Secrets Act)’이 있었다. 그 법 제2조는 공무상 비밀로 지정된 서류 또는 정보를 소지한 사람이 권한 없이 제3자에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처벌 대상 비밀의 첫 범주가 ‘국가안보 및 첩보업무에 관한 사항’이었다. 그는 퇴직하면서 정보업무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도 썼다.
영국 정부는 그의 책 출간을 저지했고 잉글랜드 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준다. 그는 영연방 호주에서 책을 출간했다. 영국 정부는 호주 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했지만 87년 패소했고, 88년 항소심에서도 패배한다. 잇단 소송으로 그의 책은 출간 전부터 화제였지만, 내용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는 책에서 MI-5 전 국장이던 로저 홀리스(Roger Hollis, 1905~1973)가 ‘제5열’이었다고 폭로했다. 여러 거물 정보원들의 실명과 활약상이 의혹과 함께 폭로됐고, 도청을 비롯한 다양한 첩보 기술을 서슴없이 까발렸다. 영국 정부를 가장 곤혹스럽게 한 내용은 MI-6(대외정보국)가 수에즈 위기 당시 추진했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암살을 추진했던 일, MI-5와 미 중앙정보국(CIA)이 노동당 출신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파병 요청을 거부한 해럴드 윌슨(1916~1995) 정부 흔들기를 시도한 일, 영연방 고위급회담 도청 사실 등이었다.
법원은(사실상 정부는) 책 내용에 대한 언론의 추적 확인 보도도 통제했다. 하지만 책은 호주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미국 ‘선데이타임스’는 피터 라이트와 시리즈 출판 계약까지 맺었다. 영국 법원도 자국민이 해외에서 출판된 책을 사 읽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87년 ‘이코노미스트’영국판은 백지 페이지에 책 출간을 반대한 상원법관의원 세 사람의 얼굴 사진을 뒤집어 실은 뒤 “한 나라(영국)를 뺀 모든 국가의 독자들은 이 페이지에서 ‘스파이캐처’의 리뷰를 읽을 수 있다”고 썼다.
1988년 오늘(10월 13일) 영국 상원은 마침내 책 출간을 승인했다. 더 이상 ‘비밀’로 보호할 의미가 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91년 유럽인권법원은 영국 정부가 유럽인권헌장이 보장한 언론자유를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한국은 군사기밀보호법과 형법(제98조 간첩죄와 99조 일반이적죄), 국가보안법(제4조 군사기밀 및 국가기밀 누설죄)으로 ‘비밀’을 삼중 방어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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