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가 1960년 10월 12일 유엔총회 본회의장에서 필리핀 대표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구두를 벗어 탁자를 두드려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필리핀 대표가 소련 강제수용소를 비난하자 흥분한 흐루시초프가 “미 제국주의자의 딸랑이(toady)”라고 고함을 지르며 구두를 벗어 탁자를 쳐댔다는 것인데, 뉴욕타임스 등이 뉴스로 보도까지 한 ‘이야기’다. 영국 대표 연설 때 그랬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떠도는 사진(위 사진, 아래 사진이 원본)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 났고, 어떤 영상 자료도 신뢰할 만한 결정적 증언도 없다. 미국에 망명한 흐루시초프의 차남 세르게이 흐루시초프(브라운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2002년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야(Izbestia) 인터뷰에서 “냉전 기간 서방측이 그를 난폭하고 교양 없는 지도자로 보이게 하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이라고 말했고, 그를 경호했던 국가보안위원회(KGB) 자하로프 장군도 “흐루시초프가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건 봤지만 구두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반면 그의 손녀 니나 크루쉬체바는 2000년 뉴스테이츠먼 인터뷰에서 또 다른 말을 했다. “그날 총회장에서 흐루시초프는 발에 꽉 끼는 새 구두가 불편해 벗고 앉아 있었는데, 필리핀 대표의 연설에 항의하느라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던 중 손목시계가 벗겨졌고, 흥분한 상태에서 시계를 주우려다가 신발이 보이자 주워 들고 책상을 친 것”이라고 말했다. 요지는 흐루리초프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신발을 벗어 책상을 칠 만큼 ‘교양’이 없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농노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교육 초등학교 2년밖에 못 받고 배관공으로 일하다 볼셰비키가 된 뒤 혁명 후 노동자학교에서 교육 받아 어쩌 어찌해서 권력자가 된 상대적으로 남루한 그의 배경과,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공식 석상에서의 돌출 행동이 잦았다는 점 등이 저 소문을 떠받쳐온 기둥이었다. 또 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의 저 유명한 비밀연설과 스탈린 격하운동, 64년 축출된 뒤 KGB 감시 하에 사실상 연금상태로 지내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방법으로 회고록 원고를 미국으로 밀반출해 출판한 일 등은 그에 대한 공적ㆍ사적인 평가를 다채롭게, 다시 말해 과도하게 미화하거나 폄하하게 한 재료가 됐다.
하지만 그가 구두를 벗어 책상을 내려친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듯도 하다. 회고록에서 그는 스페인 대표 연설 도중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는 의사를 강하게 피력하기 위해 구두를 벗어 책상을 두드린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 역시 그의 기억에만 있는 이야기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