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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객석 경계 허문 60 x 34 x 15m… 이전에 없던 공간연출 가능

입력
2015.10.1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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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내려온 극장 구조 벗어나

리프트로 무대·객석 유연하게 바꿔

플로어 높낮이도 마음대로 조절

천장의 47개 배턴 이용 세트 연출

육중한 설비는 거대한 조선소 방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한쪽 벽은 전체가 문으로 돼 있어서 완전히 열 수 있다. 개관작 차이밍량의 ‘당나라 승려’가 공연되고 있다. 이영준 교수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한쪽 벽은 전체가 문으로 돼 있어서 완전히 열 수 있다. 개관작 차이밍량의 ‘당나라 승려’가 공연되고 있다. 이영준 교수 제공

연극이나 오페라, 무용을 공연하는 극장은 흔히 프로시니엄(proscenium)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즉 객석이 있고 객석과 완전히 분리된 무대가 앞쪽에 있는 구조다. 프로시니엄은 원근법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어서, 관객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의 사건에 대한 가상이라고 인지하며 공연을 본다. 객석과 무대는 분리돼 있어서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객석은 일상의 세계고 무대 위는 1,000년 전이 될 수도 있고 먼 미래가 될 수도 있는 가상과 환상의 공간이다. 관객과 공연자는 인간과 신만큼이나 동떨어진 존재다. 관객이 무대에 올라가서도 안 되고 공연자가 객석에 간섭해서도 안 된다. 관객은 뭔가 특별한 일이 무대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입장료를 내고 공연을 본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공연장의 형태는 바로 이런 프로시니엄 구조였다. 2015년 9월 4일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유연한 공간

그날 개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극장에는 고정된 무대가 없다. 극장 전체가 평평한 플로어로 돼 있을 뿐이다. 객석도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는 사방 60×34m, 높이 15m의 커다란 장방형 공간이다. 예술극장의 비밀은 모바일에 있다. 플로어 전체는 36개의 리프트로 돼 있어서 마음대로 높이고 낮출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리프트의 높이를 다 다르게 설정하여 모자이크 같은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리프트는 최대 6.6m까지 올라간다. 높이 솟아오른 리프트는 순식간에 현대적인 공간을 고대 그리스의 신전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 버린다. 객석은 리프트 위에 쌓아서 만든다. 객석의 위치도 연출가가 원하는 아무데나 놓을 수 있다. 그리고 천정에서는 47개의 세트 배턴, 즉 막대가 있어서 무대공간을 이루는 벽이나 건물, 막 등을 배턴에 매달아 올리고 내릴 수 있다.

무대감독이 콘솔을 조작하여 리프트를 6.6m까지 들어 올렸다. 이영준 교수 제공
무대감독이 콘솔을 조작하여 리프트를 6.6m까지 들어 올렸다. 이영준 교수 제공

그래서 예술극장은 대단히 자유롭고 유연한 공간이다. 창의적인 연출가라면 무한히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유롭고 유연한 것은 공상 속의 얘기고, 실제로 이 공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얘기가 펼쳐진다. 예술극장의 설비들을 둘러보고 난 느낌은 중공업 공장이나 조선소 같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60×34×15m라는 규격은 대형 여객기가 들어갈 수 있는 격납고와 같은 크기이다. 높이 솟아오른 리프트의 속을 보니 만만치 않은 설비들이 보였다. 리프트를 지탱하는 가위형 지지대는 대단히 두껍고 튼튼한 강철로 돼 있었고, 리프트를 구동시키는 모터는 100마력이 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예술극장을 채우고 있는 설비들은 중장비들이다. 많은 인원과 소품, 설비들을 올려놓고 공연하는 곳이기 때문에 리프트는 튼튼하고 안전해야 한다. 미국의 무대용 리프트 전문업체 세라피드의 것을 쓰고 있다.

발레리나와 크레인의 만남이 곧 문화

세계에서 제일 큰 배를 척척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한국의 공업력으로 이 정도의 설비를 못 만드나 싶겠지만 공연장에서 쓰는 모든 장비들은 공연의 특성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 리프트는 그냥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작동해야 하고, 연출자가 원하는 대로 섬세하게 오르내려야 한다. 예술극장의 리프트는 한 시간 동안 천천히 오르내릴 수 있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다. 무대 경험이 없는 업체는 이런 장비를 만들 수 없다. 결국 문화의 문제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문화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흔히 문화라고 하면 소프트한 쪽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공연의 섬세한 특성과 기계설비의 우직함이 만나는, 대단히 하드하고 터프한 국면이다. 그것은 흡사 발레리나와 크레인 기사의 만남 같은 모순된 모습이다. 그러나 발레리나의 섬세함이 살아나려면 중장비들도 섬세하고 안전하게 작동해야 한다. 문화란 중장비와 오페라가 만나는, 모순적인 조화다. 그리고 그 만남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조절하고 관리하는 기술과 태도가 문화다.

긴장의 공간, 긴장을 즐기는 사람들

막을 올리고 내리는 호이스트(왼쪽) 등 많은 설비들이 천정 공간에 감춰져 있다. 이영준 교수 제공
막을 올리고 내리는 호이스트(왼쪽) 등 많은 설비들이 천정 공간에 감춰져 있다. 이영준 교수 제공

극장에서는 안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물론 안전이 일차적인 관심사인 곳은 조선소 같은 중공업현장이다. 여기저기 ‘안전제일’이라는 구호가 붙어 있고 수시로 안전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극장에서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안전이 아니라 공연 자체다. 그래서 안전이 뒤로 밀려날 수가 있다. 수많은 설비들이 오르내리는 극장에서 공연 자체에 집중하다가 안전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다. 추락사고, 오르내리는 리프트에 깔리는 사고가 날 수도 있다. 폐쇄된 극장에서 불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 공연에서 불을 쓰는 경우는 소화기를 든 소방수가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공연이 없는 텅 빈 극장에도 긴장이 가득했다. 모든 설비들의 재질과 규격은 안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져 있음이 확연히 보였다. 800㎏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세트 배턴을 올리고 내리는 모터들은 20마력짜리 튼튼한 것들이다. 천정에 올라가 봤다. 바닥은 밑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그레이팅으로 돼 있었다. 하지만 천정 위의 천정은 높이가 낮아서 머리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작업자들이 전기설비들을 손보고 다니고 있었는데 일하기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그레이팅이 튼튼해서 사람이 추락할 염려는 없지만 15m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극장 공간은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극장이란 만만한 공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물리적인 안전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극장에는 긴장이 가득하다. 필자는 아르코 대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공연시간이 다가오고 무대감독이 “1분 남았습니다”라고 했을 때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이 떨렸다. 내 한 몸에 쏠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 준비된 시간에 정확히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며 실수를 수정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 긴장의 요인이었다. 그 긴장을 견딜 수 없어서 필자는 다시는 공연 무대에는 안 오르기로 했다. 아마 그 긴장을 즐기느냐 두려워하느냐가 천부적인 공연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 같다.

극장을 움직이는데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을까? 아마도 극장을 움직이는 두 부류의 사람을 꼽으라면 예술감독과 연출가가 있을 것이다. 예술감독은 어떤 공연을 올릴 것인지 정하여 극장이 갈 방향을 지휘한다. 연출가는 공연의 내용을 만드는 작가로서, 극장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극장이란 결국 연출가가 만든 내용을 실현시켜 주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감독 밑에 프로듀서팀이 있어서 실제 공연이 이루어지도록 연출가와 협의하며 진행한다. 그리고 무대감독, 음향감독, 조명감독, 기계감독으로 이루어진 무대기술팀이 있다. 기술팀이라고 하지만 기술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공연이 가진 섬세한 면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서 기술을 다루는 팀이다. 그 밑에 흔히 크루(crew)라고 하는 일꾼들이 있어서 몸으로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을 도맡는다. 그리고 무대 디자이너, 조명 디자이너, 음향 디자이너가 각각을 디자인한다. 운영팀은 예산을 짜서 운영하고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다. 공연을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는 홍보팀도 있다. 이 많은 사람들과 엄청난 공간, 장비들의 조합에 긴장이라는 양념을 친 것이 예술극장이다.

공연예술의 새 역사를 쓸 예술극장

대단히 가변적인 구조로 된 예술극장은 살아 있는 공연장이다. 실제로 리프트와 배턴들은 공연 중간에도 오르내릴 수 있다. 이곳은 창의력 넘치는 연출가라면 얼마든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을 벌일 수 있는 곳이다. 바로 그런 공연이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하는 로버트 윌슨 연출의 전위적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이다. 이 공연은 예술극장의 모든 설비들을 최대로 활용하여 어떤 공연에서도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세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어쩌면 한국에서 이루어진 모든 공연의 역사를 다시 쓸지 모른다.

그런데 아시아예술극장에는 또 다른 역사성이 있다. 서양에서는 극장 건축에 대한 기술과 문헌들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원전 16년에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만든 건축법 제5권은 극장건축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을 보고 크게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때의 팔라디오는 이탈리아 비첸차에 올림픽 극장을 만든다. 이는 최초의 실내 공연장이다. 이는 또한 최초의 프로시니엄 무대이기도 하다. 프로시니엄 무대는 지금까지도 전세계 대부분의 극장의 기본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은 없다. 보편적인 척할 뿐이다. 예술극장은 프로시니엄 무대의 형태를 거부하여 그것이 한낱 역사적인 형태이며 그 형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천명한다. 그것이 예술극장이 보여주는 역사성이다. 예술극장은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동시대적인 기계이다.

이영준 계원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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