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단테, 미래의 시까지 대변"
브레 "겨레말큰사전 위대한 대화"
“벗어날 수 없는 두 극단의 몸짓이 벌써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을 느낄 유일한 사람을 위해 잘 말하기의 진정한 어려움. 그것은 모든 사람들과 똑같고, 거대한 도시를 품고 그 안에서 걸어가고, 가면서 자신의 죽음에 집착한다. 사운드트랙은 바람, 원초적인 동반자,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전달에 만족하는 것에 매달리면 된다. 그것의 현실은 나의 예술.”
11일 삼성동 코엑스 아셈홀의 강연장에서 한국의 고은(82) 시인과 이탈리아의 실비아 브레(62) 시인이 나란히 앉아 시를 낭독했다. 브레 시인이 자신의 시를 먼저 이탈리아어로 읽으면 뒤 이어 고은 시인이 한국어로 따라 읽었다. 브레는 2007년 ‘대리석(Marco)’으로 비아레조 문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저명한 시인이다. 서울국제도서전 참석 차 처음 한국을 방문한 그는 이날 고은 시인과 함께 ‘당신의 현실은 나의 예술’이란 주제로 2시간 가량 대담을 나눴다.
브레 시인은 성 프란체스코부터 단테, 아리오스토까지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을 설명하는 것으로 입을 뗐다. 그는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시로 꼽히는 성 프란체스코의 시는 불, 하늘, 물 등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기초 원소에 감사하는 내용”이라며 “인간은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자신과 현실의 관계에서 감사를 느꼈고, 문학은 이 놀라운 시작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은 시인은 이 말을 받아 “마르크스는 단테를 피렌체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인색하기 짝이 없는 평가”라며 “단테는 피렌체를 넘어 전 우주의 시인이며 과거의 시뿐 아니라 미래의 시까지도 대변한다. 그가 너무 위대해 그 전에도 후에도 시인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 두 사람은 단테 이후의 시인으로 살고 있다”고 말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토록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시, 곧 예술은 현실에서 어떤 힘을 갖는 것일까. 고은 시인은 시가 시공간을 초월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1,300년 전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불러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그로부터 1,000년 뒤 우리가 여기서 단테를 이야기하고 있죠. 이게 바로 시인의 시간입니다. 시인의 시간뿐 아니라 시인의 공간도 현실의 공간과 다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살다가 어디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그래서 시의 공간에서는 지중해 반도의 이탈리아와 동북아 반도의 한국이 다르지 않아요. 여러분이 실비아의 시를 통해 한국을 만나길 바랍니다.”
브레 시인은 현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닌 표현의 대상이며, 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시가 파생된다고 말했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전혀 이해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진실은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것이죠. 신비스런 현실 속에 버려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관찰력, 자각 능력 등을 이용, 이를 예술로 표현해 현실에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엔 그게 바로 시입니다.”
고은 시인은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곳에서 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며 브레 시인의 말에 동감한 뒤 자신이 좋아하는 이탈리아어 ‘알로라(allora)’를 소개했다. 시인은 “알로라는 우리 말로 하면 ‘저, 거시기’쯤 된다”며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도 갇히지 않은 말이다. 이 말을 쓰면 삶이 긴장할 필요가 없다”며 웃었다.
대담 후 브레 시인은 고은 시인이 집필에 참여하고 있는 ‘겨레말큰사전’을 언급하며 응원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한의 언어통일을 목적으로 양국의 국어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는 사전이다. 브레 시인은 “말의 목록만큼 시적인 건 없다고 생각한다”며 “그것들이 모여 위대한 대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7일 막을 연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날 닷새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주빈국 이탈리아를 필두로 아제르바이잔, 사우디아라비아 등 총 18개국이 참여했으며, 100여 개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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