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서적·교리 전파 위해 1870년대 日 등에 인쇄소 설립
류현국 교수 ‘한글 활자의 탄생’
12년간 40여개국 답사, 활자화 과정·인쇄사 집대성
글자를 인쇄하기 위한 도구인 활자가 발명된 곳은 동양이다. 11세기 중반 중국에서 활자가, 13세기 고려에서 금속활자가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압도적인 인쇄술의 발전을 통한 문서 대량생산을 필두로 근대의 문을 연 것은 서양이었다. 근대기 한중일 등 아시아 국가들은 인쇄 기술의 상당 부분을 서양인을 통해 접했다. 이런 탓인지,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했고, 로버트 램지, 존 맨, 펄 벅 등 세계 지성이 극찬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발명해 사용해온 한국이건만, 근대기 한글 활자 및 인쇄술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활자연구는 가독성 좋은 새 서체 개발, 문헌연구 등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를테면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초판의 진위 여부에 대한 판단에도 활자 연구가 참고 자료가 됐다.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학과 교수는 최근 이런 근대기 한글 활자사 연구에 획을 긋는 연구서 ‘한글 활자의 탄생’(홍시)를 내놨다. 그간 목활자나, 직지를 포함한 조선왕조 동활자 연구 등에만 집중됐던 시선을 근대로 돌려, 근대 한글활자의 개발과 전파, 보급 과정을 조명했다. 12년간 세계 40여개국을 답사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근대 한글 활자의 기록과 인쇄사를 분석해 기록했다.
류 교수에 따르면, 근대식 활자와 인쇄술로 한글간행물을 펴내기 시작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18세기 초 서양에서 중국 등 동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자 납활자가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을 통해 서양인들의 눈에 한글이라는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재무담당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1668) 등을 통해 서구에 한글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의 문자학계는 문자 역사에서 한글처럼 독창적으로 개발된 문자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1869년 천주교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리델 주교 등 성직자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일은 교회 서적의 인쇄와 보급이었다. 조선 왕실의 탄압으로 중국, 일본 등에 머물렀던 천주교 사제들은 1870년대부터 만주, 일본 등에서 한글 교리서 저술을 진행했고, 1881년에는 나가사키에 조선교구 인쇄소를 설립해 보다 본격적인 한글 문서 인쇄를 시작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는데, 1874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 동북부지부에 부임한 존 로스 목사 등은 중국 책에서 추출한 한글 서체를 토대로 1877년 중국 상해에서 ‘조선어 초보(Corean primer)’를 만드는 등 적극 활동했다.
책의 본문에 사용 가능한 양질의 소형활자가 적용된 첫 출판물은 1879년 나온 ‘한불자전’인데 코스트 신부가 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그린 한글을 토대로 활자를 제작해 이름없는 장인들과 함께 500권을 간행했다. 서양식 가로쓰기, 띄어쓰기 등을 적용한 점이 특징이다.
1910년 전후로는 조선에 진출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출판사와 인쇄소가 설립되고 민간인 인쇄업자도 나왔다. 한글판 ‘독립신문’(1896년)을 비롯해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국민신보 등이 잇달아 한글로 간행되며 한글문화로의 혁명이 서서히 진행됐다.
류 교수는 “근대 활자 인쇄사를 명확히 조사해 한글의 과거를 알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완성도 높은 서체 개발과 비평을 유도하는 기초자료가 된다”며 “서양인들이 18세기초부터 19세기 말 개발한 다양한 한글 활자는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가 됐지만 세간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진 실정”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글이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활자체의 원형과 활자인쇄사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거론하고 자랑해본 적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며 “한글 활자체의 원류와 발달의 계보 속에는 진정한 한국인의 문화 기술 정신에 관한 메시지를 후대에 전달하고자 했던 세종의 철학과 집현전 학자들의 소망이 잠재해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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