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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행복한 숨쉬기

입력
2015.10.0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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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한강변에서 가깝다. 틈이 나면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남짓 강변을 걷다 온다. 한동안 다니다 보니 자주 가는 길이 생겨났다. 망원시장을 지나 성산나들목 쪽에서 한강변으로 들어가 절두산성당이나 상수나들목 쪽으로 나오는 길. 성산나들목 쪽에서 난지캠핑장 방향으로 걷는 길도 좋다. 돌아올 때는 월드컵경기장 앞 평화공원을 지나거나 홍제천변을 거슬러 오르기도 한다.

어느 길을 잡든 탁 트인 한강과 함께 걷는 길은 상쾌한 기운을 몸과 마음에 불어넣는다. 잠시나마 서울이라는 도시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간혹 자전거 길과 보행자 길이 좁게 엉키거나 이런저런 공사 탓에 불편을 겪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제는 웬만큼 정비되어 걷기의 즐거움을 방해 받는 일이란 거의 없다.

가끔 마주치는 공사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산책길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상수나들목에서 서강대교 방향 초입에 홍제천에서 내려오는 큰 하수관구가 있고 그 사이를 건너는 낡은 다리가 있었다. 아주 예전에 만들어진 터라 폭이 좁아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과 도보 산책자들이 서로를 피하느라 꽤 신경을 써야 했고, 폭우라도 쏟아지면 잠기기 일쑤였다. 다리가 잠긴다는 것은 거기서 한강길이 끊어진다는 걸 뜻한다.

4, 5년 걸렸으려나. 지금은 아주 근사한 다리로 바뀌었는데, 공사에 따른 약간의 불편만 감수한다면 아주 더디게 조금씩 진척되는 공사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한강 산책의 숨은 재미였다. 어떤 때는 포클레인의 능란한 기예를 한참 넋을 잃고 구경하기도 했거니와, 이 역시 한강 산책이 주는 선물의 일부였다. 강변의 풍경을 더하고 산책자들을 위로하는 한강길의 각종 꽃과 수목이 하나하나 사람의 손길로 심어지고 관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런 시간을 통해서였다.

훼방꾼조차 선물이라면, 준비된 선물은 훨씬 많다. 가는 길의 망원시장은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갔던 시장의 기억만으로도 마음의 풍경을 바꾼다. 무 한 단, 고등어 한 마리, 어묵 한 덩이, 내복 한 벌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바쁘거나 느긋하고 시장길은 언제든 환하다. 오가는 길에 책방을 들르기도 한다.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런 흐름을 거슬러 일종의 작은 문화공간으로 특색 있는 ‘동네책방’이 하나 둘씩 새로 출현하고 있기도 하다. 망원시장 근처에도 그런 곳이 있다.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책방지기가 밝은 눈으로 골라놓은 책들을 구경한다. 차도 한잔 마신다. 절두산 성지는 봄가을 꽃과 단풍이 이루는 풍경이 근사하다. 초를 켜고 기도를 올리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한다. 성지 옆 외국인선교사묘원의 묘비들은 거기 적힌 이름과 생몰연대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당인리발전소 근처의 미로 같은 골목길과 오래된 집들은 일대의 개발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의 선물은 한강변을 따라 걷는 시간 그 자체다. 봄가을이 가장 좋지만, 여름과 겨울의 한강변 풍광은 또 그것대로 각별한 운치가 있다. 흐르는 강물은 세상의 잡답을 조금은 씻어준다. 서울의 찌든 공기로부터 완전히 면제된 공간이야 없겠지만, 탁 트인 너른 강물과 사철 강변의 수목들은 확실히 공기와 바람의 맛을 달리 전해준다. 멀리 보이는 선유도와 밤섬, 여의도의 빌딩들도 한강의 풍광에 합류하며 걷기의 지루함을 달랜다.

어떤 이들에게는 한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테다. 하루하루는 너무 버겁고 세상은 점점 더 강퍅하고 가팔라진다. 행복은 광고 속 판타지나 행복 전도사들의 구호 속에만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걷다 보면, 아주 가끔은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행복한 숨쉬기를 부끄러운 권리로 만드는 억압과 기만은 강 저쪽에도 있고 이쪽에도 있다. 할 일은 해야 할 테다. 그러나 행복한 숨쉬기는 유예할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어야 한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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