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뭘 할거냐는 자식의 질문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스러웠지만
꿈꾸지 않으면 제2의 인생은 없다
몇 년 전 대학입시를 앞둔 딸 아이에게 향후 진로에 대해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던 적이 있다. 아이는 “난 꿈이 있으니 아빠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향후 몇 년 간의 구체적인 스케줄을 나름대로 제시했다. 하지만 학교 성적이 중ㆍ하위권이라 좋은 대학을 갈 희망이 없었고, 별다른 재능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이토록 자신감을 갖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꿈이란 게 뭐냐”고 물어봤다. 대충 들어보니 연예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한 느낌이 들었고,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가 헛바람이 들어 공부는커녕 여전히 허황한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아 걱정이 됐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꿈’에 대해서 말해줬다. “목표와 꿈은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가령 네가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목표에 불과하다.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것은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프리카에서 의술을 펼치면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라는 얘기다. 단지 가수나 탤런트가 되겠다는 것은 목표일 뿐이다. 연예인이 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세상을 조금이나마 밝아질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그건 꿈이겠다.” (사실 몇 년 전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개똥철학 삼아 했던 이 말을 타사 후배 기자가 신문에 일부 인용한 바 있다). 이 말이 논리적으로 그럴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빠는 교수가 됐더라면 좋았겠네”라며 괜한 잔소리 취급을 했다. 아이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은 듯했지만, 어쨌거나 다음 해 대학의 관련 학과에 입학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영화 ‘인턴’을 봤다. 영화에서 원로배우 로버트 드니로가 70세 인턴으로 등장한다. 그는 전화번호부 인쇄회사에 부사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한 뒤 몇 년을 쉬다가 30세의 젊은 여성 CEO 앤 해서웨이가 운영하는 온라인 패션스타트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회사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드니로는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한 해서웨이와 직원들에게 아날로그적 노련한 방법을 동원해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점차 신뢰를 얻게 된다. 젊은 세대의 패기와 노년의 경험이 어우러지는 상생의 한 사례를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로 다가오는 영화였다.
아이가 이 영화를 본 소감을 묻길래 “은퇴 이후 내가 뭘 하면 좋을까를 한번 생각하게 했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되물었다. “은퇴하면 뭘 할 생각이냐”는 것이다. “글쎄, 너 유명해지면 뒷바라지나 할까?” 했더니 단칼에 거절했다. “가족끼리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빠의 진짜 꿈은 뭐냐. 은퇴 후에 진짜 하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잠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몇 년 전 내가 아이에게 한 질문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내가 자식에게 꿈에 대한 질문을 받다니 늙긴 늙었나 보다. 그런데 과연 내 꿈이 뭔가. 꿈이 있었던가. 어떤 꿈이라도 꿔 본 적이 있었던가. 그저 직장 생활하면서 월급 받고 큰 문제없이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 꿈이었을까.
요즘 선후배나 친구들을 술자리에서 만나면 빠지지 않는 화제가 ‘은퇴 이후에도 살아야 할 30년’에 대한 것이다. 이미 은퇴한 선배들도 계속 자리를 찾아 헤맨다고 고백한다. 산을 전전하는 것도 지쳤단다. 배관공과 굴삭기 운전 자격증을 딴 선배들도 있다. 직장에 붙어있는 이들도 은퇴 후가 고민이라고 했다. 직장에 있을 때 은퇴 후를 준비해야 한다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은퇴하고도 30년 이상을 무직 상태에서 견디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다시 꿈을 꿔야 한다는 것이 각종 모임의 결론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꿈꾸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새로운 것은 할 수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제2의 인생을 꿈꿔보자는 것이다.
조재우 논설위원 josus6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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