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과 10월의 차이가 이렇게 극명하게 드러난 적도 없을 것이다.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한여름 같은 땡볕이 쏟아지더니 지난 1일 초록을 씻어내는 빗줄기와 함께 싸늘한 가을 한기가 찾아 들었다.
그렇게 계절의 변곡점을 넘은 가을은 본격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화려한 가을빛이 제일 먼저 짙게 물들기 시작하는 곳은 하늘과 맞닿은 저 높은 고원. 구름이 넘고 시간이 넘고 계절이 흘러 넘는 천상의 고갯마루들이 서둘러 가을을 맞고 있다.
대관령 하늘목장
하늘목장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대관령 자락에 있다. 눈트레킹 코스로 이름난 선자령(1,157m)의 산마루 서쪽에 자리한 여의도 4배 되는 1,000만㎡ 규모의 초원이다. 1970년대 국민들에게 보다 나은 먹거리를 제공하고자 국가가 독려해 조성된 목장이다.
74년 한일농산으로 문을 열고 목축업을 일궈오다 2014년 체험목장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말과 소, 목동 만의 세상이 40년 만에 문을 열자, 그 목가적인 풍경을 보러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지난 1년 간 2만5,000여명이 찾았다고 한다.
하늘목장의 상징과 같은 트랙터마차를 타고 오른 하늘마루전망대. 애석하게도 날이 흐려 기대했던 파란 가을 하늘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능선 위로 구름이 꾸역꾸역 밀려 올라오며 이제 막 누렇게 변하기 시작한 초원을 촉촉히 적시고 있었다. 커다랗게 말아 올린 건초더미가 초원 이곳 저곳에서 뒹굴고 있고, 경사면엔 군락을 지은 억새가 은빛 붓놀림으로 가을 바람을 그려대고 있다.
하늘마루전망대에서 선자령까지는 20여분 거리다. 선자령은 한겨울 설원 트레커나 봄철 야생화꾼이 몰려드는 곳인데, 이전까지는 옛대관령휴게소부터 먼 길을 걸어야 당도할 수 있었지만, 이제 하늘목장 개장으로 보다 가깝고 쉬운 길이 생겼다.
일반인 출입이 없었기에 목장 본연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는 하늘목장엔 젖소 400마리, 한우 100마리와 승용마, 경주마, 양, 염소 등 500여 마리의 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곳의 소나 말들은 너른 초지에 맘껏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살아서인지 스트레스가 적어 보인다. 관람객이 오면 도망가질 않고 가까이 다가와 같이 놀자며 눈을 마주친다.
목장의 목동들이 다니던 흙길들이 이젠 관람객들을 위한 힐링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한적하게 초원의 소와 말들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자리숲길’과 ‘앞등목장길’, 이제 막 단풍이 짙게 물들기 시작한 숲길인 ‘숲속여울길’ 등은 꼭 걸어볼 만한 코스다. 숲속여울길 옆으로는 송천으로 흘러 드는 제법 풍부한 수량의 계곡이 이어진다.
이 하늘목장엔 모두 29개의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다. 대관령 전역에 설치된 게 49개이니 절반 이상이 이 목장에 집중돼 있는 것. 운무에 싸인 초지의 산책로를 걷는 재미도 남다르다. 비록 흐릿한 시야로 너울진 능선을 볼 수 없지만 구름 속을 걷는듯한 몽환적인 느낌에 취할 수 있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은 하늘목장의 1단지다. 바로 옆 거의 같은 규모인 하늘목장 2단지는 오로지 말을 타는 외승체험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2단지엔 소나 말도 방목하지 않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그저 오래된 길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나무, 이따금 허공을 가르는 풍력발전기뿐이다. 드넓은 초지 위로 거칠 것 없이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
목장 관계자는 2단지에서의 외승은 각기 다른 3개 대륙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낮은 풀과 갈대가 구릉을 타고 바람에 흩날리는 몽골 초원이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새 미 서부의 포장마차가 달렸음직한 모습의 투박한 마찻길과 키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풍광이 나타난다. 그렇게 조금 더 달리면 유럽 알프스를 연상케하는 그림 같은 초원지대도 만나게 된다.
이날 외승을 안내한 전문 승마코치는 2명. 박준현(37)씨와 몽골에서 온 빌군(25)씨. 공교롭게도 둘 다 말띠다. 박 코치는 “싱싱하고 풍부한 초지 때문에 2단지 외승 코스는 사람뿐 아니라 말도 좋아한다”며 “국내 다른 곳에서도 외승이 가능하지만 이런 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른 곳의 외승은 방풍림 안의 초지나 숲길, 임도를 달리는 정도인데 백두대간의 너른 산자락을 발 아래 두고 초원을 내달리는 건 여기뿐이라는 것. 이곳에서 말을 달려본 이들은 입을 모아 ‘뻥 뚫린다’고 말한다고 했다. 광활한 풍광에 시야가 시원해지며 백두대간을 넘어온 바람에 가슴도 뻥 뚫린다고.
외승은 코치의 안내를 받으며 주로 초원 위를 걷거나 가볍게 달리는 형태로 진행된다. 지형이 험한 경우에만 길을 이용한다. 마치 말을 타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말도 길 대신 풀밭 위에서 달리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게 박 코치의 설명이다.
승마코치들이 내달리는 걸 한참 따라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온 초원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지나온 길이 이토록 멋졌단 말인가. 먼 훗날 뒤돌아 본 내 삶의 모습도 이만큼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만항재 운탄고도
함백산 중턱에 있는 만항재는 강원 정선과 영월, 태백이 만나는 고개다. 만항재는 지리산 정령치(1,172m) 보다 높은 해발 1,330m로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오를 수 있는 포장도로 중 가장 높은 고개다. 동네 사람들은 예부터 이 고갯길을 늦은목이재로 불렀다고 한다. 고한 주민들은 이 재를 넘어 태백의 황지를 거쳐 봉화의 춘양장을 보고 왔다고 한다.
들머리의 옛삼탄광업소였던 아트마인과 적멸보궁인 정암사 등을 지난 고갯길은 이리 저리 굽이치며 구름 속으로 올라간다. 마침내 마루에 올라섰을 때 주변은 희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만항재 정상 주변은 봄부터 가을까지 희귀한 고원의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나 천상의 화원으로 소문난 곳이다. 안개의 시각효과로 숲 속 꽃밭의 풍경이 더욱 신령스럽다.
이 만항재 정상에서 시작해 능선을 타고 예미의 새비재까지 이어진 비포장 임도가 있다. 최근 ‘운탄고도’라는 이름이 붙여진 길이다. 난방을 해야 하는 철에 국민들의 주요 사망원인이 연탄가스 중독일 정도로 석탄이 중요하던 시절 만들어진 길이다. 탄광에서 기차역까지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해발 1,100m의 산자락에 2,000여명의 국토건설단이 삽과 곡괭이로 만든 길이다. 석탄을 실은 트럭들이 시커먼 탄가루를 흩날리며 다니던 수십㎞ 되는 이 길은 주변 300여 탄광이 문을 닫으며 제 역할을 졸업했고, 이후 산림청의 임도로 활용돼왔다.
이렇게 ‘탄을 나르던 높은 산길’을 강원랜드 하이원리조트가 새로 트레킹 코스로 정비해 ‘구름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고원의 길’로 만든 것. 유장한 산세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총 32㎞의 긴 코스로 한 번에 전 구간을 완주하기는 쉽지 않다. 만항재-하이원CC-화절령-새비재 등 3개 구간으로 나눠 이를 한 코스씩 걷는 걸 추천한다.
이 길은 마냥 걷기도 좋지만 산악자전거에 익숙하다면 은륜에 몸을 싣는 것도 좋겠다. 깊은 가을빛에 빠져들고 있는 지금이 적기다.
평창ㆍ정선=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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