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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사기… 음반 번번이 좌절… 노래 연습하며 버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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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사기… 음반 번번이 좌절… 노래 연습하며 버텨"

입력
2015.10.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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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성공해 더 힘들어"

지난달 신곡내고 활동 재개

80년대 후반 인기를 누린 김승진(왼쪽)과 김완선(오른쪽). 김승진은 “집에 매일 같이 100여명이 팬들이 진을 쳐 못 들어간 적 있다”고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80년대 후반 인기를 누린 김승진(왼쪽)과 김완선(오른쪽). 김승진은 “집에 매일 같이 100여명이 팬들이 진을 쳐 못 들어간 적 있다”고 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스잔’으로 인기를 구가했던 김승진의 모습. 고2 때 데뷔한 그는 “그땐 의상 협찬이 없어 주로 이태원에서 옷을 직접 샀다”고 말했다. 김승진은 특히 하영수 디자이너의 옷을 좋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스잔’으로 인기를 구가했던 김승진의 모습. 고2 때 데뷔한 그는 “그땐 의상 협찬이 없어 주로 이태원에서 옷을 직접 샀다”고 말했다. 김승진은 특히 하영수 디자이너의 옷을 좋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젠 버틸 수 없다고~”. ‘어디에서 나타났나 황금박쥐’란 가면을 쓴 사내가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열창해 MBC ‘복면가왕’ 시청자를 사로 잡았다. 왼손에 가죽 장갑을 끼고 은색 목걸이를 한 채 무대에 선 모습이 범상치 않다. “김승진씨 아냐?” 판정단인 신봉선이 옆자리 김창렬에게 묻자 “승진이 형은 저렇게 노래 못해”라며 웃었다. 하지만 복면을 벗자 그 주인공은 ‘스잔’으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김승진(47). “방송 끝나고 (김)창렬이한테 연락 왔어요. 제가 ‘어 그래, 가창력 없는 가수형이야’라고 장난쳤더니 죄송하다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최근 서초구 방배동 녹음실에서 만난 김승진은 군살 없는 몸매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여전하다”고 묻자 김승진은 “운동을 해도 나잇살은 어쩔 수 없더라”며 배를 만지며 쑥스러워했다. 1980~90년대 TV 속에서 보던 뽀얀 얼굴과 달리 직접 만난 그의 얼굴은 까맣게 보였다. “원래 피부가 까맣다”는 김승진은 “어려선 어머니가 쓰던 화장품을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고 노래해 하얗게 보인 거다. 스타일리스트 없이 나 혼자 분장하고 다녔을 때니까”라며 웃었다.

데뷔 30년을 맞아 최근 방배동 녹음실에 만난 가수 김승진은 "고2 때 미용실에서 운 일"을 가장 부끄러운 기억으로 꼽았다. "머리를 잘라 속상해 울었는데 옆에서 전인화가 보고 예쁘다고 다독여 줬다"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중대 연극영화과에서 선후배로 만났다. JW엔터테인먼트 제공
데뷔 30년을 맞아 최근 방배동 녹음실에 만난 가수 김승진은 "고2 때 미용실에서 운 일"을 가장 부끄러운 기억으로 꼽았다. "머리를 잘라 속상해 울었는데 옆에서 전인화가 보고 예쁘다고 다독여 줬다"고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중대 연극영화과에서 선후배로 만났다. JW엔터테인먼트 제공

1985년 1집 ‘오늘은 말할 거야’로 데뷔한 김승진은 올해 30주년을 맞았다. 그는 지난달 신곡 ‘나 혼자서’ 등이 실린 ‘퍼스트 싱글’ 음반으로 오랜 만에 팬들 앞에 섰다. 2005년 낸 ‘무사지심’ 후 10년 만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데뷔해 ‘유리창에 그린 안녕’등으로 인기를 누렸던 하이틴스타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1993년부터 산전수전을 겪었다. 영턱스클럽을 제작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주노와 준비했던 앨범 등이 외환위기(IMF) 전후로 번번이 무산됐고, 2000년대 초반 미카엘밴드를 준비할 땐 투자금을 도둑 맞았다. 2008년 일본 활동 제의가 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현해탄을 건넜는데, 돌아온 건 냉대뿐이었다. 김승진은 “사기도 당하고 충격이 커 불빛을 가린 채 집에 칩거하며 술에 의존해 지냈다”고 지난 고충을 털어놨다. 경제적 어려움에 물만 먹고 하루를 버틴 적도 있다. 돈이 궁해도 업소엔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다. “어려서 성공해 위기가 더 힘들었다”는 김승진은 하지만 “밟으면 밟을수록 죽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않는 게 내 장점”이라고 했다.

그는 ‘악바리’였다. 청춘스타로서 누리던 인기가 사라지고 10년 동안 음반을 내지 못했지만 한 달 이상 노래 연습을 빼 먹은 적이 없다. 마을버스를 타고 다녔던 종로 통의동 연습실에 주로 갔다. 김승진은 “돈이 좀 생기면 홍대 연습실로 가 노래를 불렀다”고 너스레를 떨며 “노래는 반복적인 연습이 중요해 다시 앨범을 낼 때를 위해 계속 연습했다”고 말했다.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파일철에는 노래 연습한 악보와 발성법을 메모한 A4용지가 수북이 꽂혀있었다. 이렇게 만든 ‘김승진의 음악노트’가 7권이다.

1985년 데뷔 시절 김승진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5년 데뷔 시절 김승진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전성기 시절 얘기가 나오자 “차에서 하도 먹고자 척추측만증이 생겼다”는 얘길 먼저 꺼냈다. “예전엔 호텔도 드물었을 뿐 더라 피서철에 지방 행사를 가면 민박도 못 구해 차 안에서 자기 일수였다”며 “차에서 쭈그려 잔 뒤 어떤 날은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세수하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는 말도 들려줬다.

김승진 하면 연관 검색어처럼 따라 오는 이가 ‘경아’를 부른 박혜성이다. 두 사람의 인기 경쟁이 워낙 치열해 ‘스잔파’와 ‘경아파’ 사이 패싸움이 벌어졌을 정도다. 1980년대 후반 라이벌구도를 형성하며 소녀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인기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스잔파’와 ‘경아파’ 사이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다. 김승진은 “한 팬이 박혜성 팬과 싸움이 나 이빨이 부러진 적이 있어 그걸 치료해 준 적도 있다”고 했다. 박혜성과의 친분을 묻자 “우리 둘은 성격이 정반대”라며 “혜성이는 조용하고 술과 담배를 안 해 친해질 계기가 없었다”고 답했다. 그는 또래가수보다 되레 “나미 민혜경 같은 누나들과 친했다”고 말을 이었다. “(민)혜경이 누나랑 술을 많이 먹었죠. 나미 누난 미국에서 벨트 등을 사오면 징 박힌 거 쓰라며 주기도 했고요.”

데뷔 30년을 맞아 최근 음반을 낸 그는 목소리도, 몸매도 여전했다. JW엔터테인먼트 제공
데뷔 30년을 맞아 최근 음반을 낸 그는 목소리도, 몸매도 여전했다. JW엔터테인먼트 제공

노총각 김승진은 “외롭긴 한데 지금은 음악 생각이 더 커 결혼에 조바심을 내진 않는다”고 했다.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 김승진은 올 연말 전국을 도는 소극장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30년이 흘러 옛 활동 영상을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어려웠지만 음악을 꾸준히 하며 버텨왔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요. 저를 보면서 꿈을 놓치고 살았던 제 또래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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