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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 편지지서 찾은 지문…'트렁크 살인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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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속 편지지서 찾은 지문…'트렁크 살인범' 밝혔다

입력
2015.10.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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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곤 검거 등 과학수사팀 뒷이야기

화재 진압 때 차내 증거들 거의 훼손

의외로 피해자 가방 안서 흔적 발견

원한에 무게 둔 경찰 수사 방향 바꿔

지난달 마사지업소 주인 살인사건도

5차례 현장 방문 끝에 범인 밝혀내

트렁크 시신 사건의 현장 검증이 실시된 23일 오전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 빌라 근처에서 피의자 김일곤이 범행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렁크 시신 사건의 현장 검증이 실시된 23일 오전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 빌라 근처에서 피의자 김일곤이 범행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렁크 살인사건’이란 엽기적 범죄가 세상에 알려진 건 지난달 11일. 그로부터 엿새 뒤 피의자 김일곤(48)은 시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시신이 든 차량의 방화 사건이 발생할 때만 해도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만 확보했을 뿐, 범인을 특정할 만한 아무런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 잔인하게 시신이 훼손됐고, 심지어 불에 탄 정황으로 미뤄 원한이나 치정관계에 의한 살인에 무게를 둔 정도였다. 반전은 사건 발생 8시간 뒤 일어났다. 김일곤의 신원이 극적으로 확인된 것. 이후 경찰 수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끈질기게 범인의 흔적을 뒤쫓고 작은 단서도 지나치지 않은 과학수사의 힘 덕분이었다.

당시 범인이 김일곤임을 밝혀낸 서울경찰청 광역과학수사 5팀이 4일 8시간의 숨막히는 수사 과정을 뒤늦게 털어 놓았다. 먼저 수사팀 최철호(44) 경위는 지난달 11일 오후 3시 방화 현장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수많은 증거가 훼손돼 수사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고 그는 말했다. 현장은 엉망이었다. 화재 신고를 한 주민과 소방대원들이 차량 내부에 있던 물건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분말 소화기와 물을 뿌려댄 통에 증거다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수사팀은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증거보존용 봉투에 담았다. 가방과 비닐봉투, 책, 비어 있는 요구르트병 등 눈에 보이는 물건은 물론이고, 운전석 시트와 다른 재질의 섬유조각 등 혹시 범인의 유전자정보(DNA)가 검출될지도 모를 미세한 증거도 수집 대상이 됐다. 피해자 시신에서는 혈흔과 손톱, 입술 등 여러 부위에서 DNA를 채취했다. 트렁크 손잡이 옆 부분에서 희미하게 보인 엄지 모양의 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팀장인 공선회(39) 경감은 “이런 경우 보통은 흑색 분말을 뿌려 지문을 선명하게 하는데 소화기 분말로 뒤덮인 탓에 손전등 불빛으로 음영을 만들어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1차 현장조사를 마치기까지 7시간이 소요됐다.

본격적인 감정을 위해 수사본부인 서울 성동경찰서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10시쯤. 각자 분배된 감정물을 받아 든 팀원 6명은 며칠이 걸릴지 모를 지난한 흔적 찾기에 돌입했다. 빌라 출입문에서 떼어 온 철제 손잡이는 정밀감식기기에 넣었고, 트렁크 옆에서 찍은 지문 사진은 경찰청에 긴급감정을 의뢰했다.

그러나 불과 1시간 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결정적 단서가 튀어 나왔다. 피해자 가방 안에 있던 편지지 뒷면에 발라 놓은 닌히드린 용액이 마르면서 붉은색 빛깔의 지문이 선명히 나타난 것. 닌히드린은 땀의 지방과 염분 성분에 반응하는 물질로 과학수사에서 지문 추출에 많이 활용된다. 최 경위는 “수사팀 전부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때”라고 회고했다. 곧이어 지문검색시스템에서 피해자 나이와 동일한 나이대를 중심으로 검색 범위를 넓혀 나가기를 1시간쯤 하던 무렵 지문의 주인과 같은 이름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1967년생 김일곤. CCTV에 찍힌 인물과 동일인인 사실도 확인됐다. 김일곤이 트렁크 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까지 사건 발생 전후로 피해자와 통화한 남성 3,4명의 뒤를 쫓던 수사본부는 수사의 방향을 돌려 김일곤만 추적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중랑구의 한 마사지업소 주인 A(61ㆍ여)씨를 살해한 손모(44)씨 검거 때에도 수사팀의 끈기는 빛을 발했다. A씨가 숨진 채 쓰러져 있던 현장은 베테랑 형사들도 사고사와 타살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난해한 모습이었다. A씨의 목에 있는 손톱 모양의 상처들(조흔)과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혈흔은 사고사 현장과도 유사했다. 부검 결과 A씨의 뒤통수에서 발견된 상처나 조흔 역시 타살임을 입증하지 못했다. 또 다섯 차례 반복된 현장 감식에서도 다른 지문이나 DNA는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범인의 흔적은 범행 장소가 아닌 전혀 엉뚱한 데에 있었다. 피해자가 생활하는 내실 안에 배즙 박스로 만든 종이 수납장 겉에서 손씨의 지문이 발견된 것. 김병호(41) 경사는 “범인은 CCTV를 추적해 검거했지만 재판에서는 가까스로 찾아낸 지문이 손씨의 범행을 증명하는 핵심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동현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장은 “갈수록 지능화하는 범죄에 대처하려면 과학수사도 범행 이후뿐 아니라 범행 전의 행적에도 집중하고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범인의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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