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있던 가을 정기세일이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주부 연모 씨(42)는 사상 최대 규모의 할인행사라는 '코리아그랜드세일'을 맞아 4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찾았다. 하지만 할인율은 매년 있었던 가을 정기세일과 큰 차이가 없었고, 대부분 신상품은 세일 품목에서 제외돼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정부가 소비 촉진을 위해 추진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인 코리아그랜드세일이 지난 1일 시작된 가운데, 행사 시작 후 첫 일요일인 이날 롯데백화점 본점은 아침부터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 코리아그랜드세일을 맞아 고객들이 4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으로 들어서고 있다.
임민환 기자 limm@sporbiz.co.kr
특히 이번 세일에는 중국 최대 명절인 국경절 연휴(10.1~7)를 활용해 방한한 중국인 관광객(유커)도 인파에 한몫을 했다. 백화점 곳곳에는 중국인 관광객의 안내를 돕는 직원들이 서있었고, 특별기념품을 증정한다는 문구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함께 표기되어있을 정도였다.
정부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여파에서 벗어나 소비가 조금씩 살아나는 만큼 그 불씨를 살려나가겠다는 취지로 이번 세일을 준비했다.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등 대형유통업체 2만7,000여곳이 참여해 최대 50∼70%의 할인율이 적용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펼쳤다. 하지만 예상보다 할인율이 적고 할인 품목 역시 기대에 못 미쳐 '무늬만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 손님 끌기는 성공, 하지만 소비자 만족은 '글쎄'
이번 코리아그랜드세일로 백화점을 비롯한 대형유통업체에는 많은 사람이 몰렸다. 롯데백화점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세일 기간이 시작된 이후 롯데백화점의 방문자 수는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약 20%, 매출은 약 25% 증가했다.
'구호만 요란한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백화점 업계는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로 집객효과를 톡톡히 봤다. 동시에 행사를 진행한 대형마트, 재래시장, 편의점보다는 백화점 쪽에 많은 사람이 몰렸기 때문이다.

▲ 4일 코리아그랜드세일이 진행되고 있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의 한 매장을 고객들이 지나가고 있다.
임민환 기자 limm@sporbiz.co.kr
이렇게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매장을 찾은 소비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막상 와보니 명품이나 유명 브랜드, 가을·겨울 신상품이 포함되지 않고 세일폭도 일반 행사와 다를 게 없다며 '보여주기식 일회성 행사'라는 목소리가 많았다.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말만 듣고 미국의 같은 이름의 행사를 생각하고 찾아간 사람들은 그동안 항상 있어왔던 세일에 고작 10~20%의 할인율만 더한 이번 세일에 당황스러움을 표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것이다.
백화점을 찾은 대학생 최모 씨(23)는 "최대 규모 세일이라고 해서 왔는데 마음에 드는 물품들은 다 신상(품)이라서 세일에서 제외되어있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이번 코리아그랜드세일은 준비한 시간이 적었다"며 "제조업체에서 인하된 가격의 제품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할인율이 작을 수밖에 없다. 가을 정기세일 수준"이라고 말했다.
▲ 이번에도 소외된 재래시장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의 소형 점포는 이번 코리아그랜드세일이 시작되면서 피해를 보기도 했다.
코리아그랜드세일 기간의 첫 주말,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을 비롯한 전통시장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망원시장의 상인들은 대부분 코리아그랜드세일에 참여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망원시장의 한 가게 주인은 "재래시장이 원래 싸게 팔고 있다. 어떻게 상품을 더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소비자들이 백화점 등 대형 유통업체로 몰리면서 일부 전통시장은 평소보다 더 썰렁한 분위기였다. 서울 목동시장의 한 의류 매장 상인은 "우리는 코리아그랜드세일 때문에 매출이 줄었다"며 "누굴 위해서 만들어낸 정책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통시장 상인회들은 정부의 졸속행정을 질타했다. 행사 안내를 통보받은 것은 코리아그랜드세일을 앞둔 불과 며칠 전이었다. 때문에 전통시장은 소비자들의 기대가 가장 컸던 10월 첫 주말, 뒷짐만 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사 참여 점포의 98%를 차지하는 편의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CU, GS25, 세븐일레븐 등 국내 편의점들은 인기 상품에 대해 쿠폰 지급, 2+1 증정, 일부 품목 할인 판매 등의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부분 평소에 있었던 행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종로구의 한 편의점 점주는 "코리아그랜드세일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 아마 정부에서 생색을 내려고 하는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 대안은?…복지차원의 접근도 필요
정부는 보건복지부 주도로 사회적 약자 계층을 지원하기 위해 바우처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바우처는 돌봄과 지원이 필요한 노인과 장애인, 아동 등에게 특정분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상품권 형태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바우처 대상자에게 카드회사를 통해 카드(국민행복카드)를 발급해주고 대상자가 관련 민간기관의 서비스를 이용한 뒤 바우처 카드로 결제하면 정부가 나중에 비용을 지급해 주는 방식이다. 이 사업의 혜택을 보는 국민은 8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저소득층에게 식료품 구매권(푸드 스탬프)를 나눠주듯 코리아그랜드 세일 기간 중 바우처 카드 소지자들에게 전통시장을 이용할 경우 일정금액을 지원해주는 방안도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코리아그랜드세일은 지난 8월 갑작스럽게 결정돼 꼼꼼한 사전 검토나 관련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하지 않다는 평이다.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11월 말에 시작돼 제조업체들이 연말 재고 소진과 이듬해 신상품 판매를 위해 자발적으로 파격 할인에 나선다. 하지만 추석도 지났고 연말이 3개월이나 남은 우리나라 사정은 생각하지 않은 채 최대 할인행사라는 블랙 프라이데이를 억지로 꿰맞추려다보니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는 다른 한국의 유통구조도 걸림돌이다. 미국은 마트들이 상품을 직접 매입하는 구조이다 보니 할인율을 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유통업체들이 생산자들에게 임대하는 기능을 하고 있어 할인폭을 크게 가져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유통업체보다는 삼성전자 등과 같이 제품 생산업체들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정희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등으로 위축된 소비를 진작시키려는 시도는 좋지만 시기가 맞지 않았다"며 "정부가 이 행사를 연례행사로 검토하고 있다면 보다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서연 기자, 김재웅 기자 brainysy@, jukoas@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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