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색한 웃음이 역력했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부담스러운 듯했다. 예전 은막을 수놓은 원로답지 않았다. 곁에 선 중년의 딸이 “엄마 손 한번 흔들어줘. 쑥스러워서 이러시는 것 같네”라고 말할 정도였다. 질의응답이 이어지자 팔순의 여인은 곧 여배우로 활동하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김기영 감독의 충무로 고전영화 ‘하녀’(1960)에 출연해 ‘전설의 배우’란 호칭을 얻은 원로 배우 이은심(80)씨가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 4일 오후 기자들과 만났다. 배우 은퇴 뒤 1982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간 이씨는 브라질 대도시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산타카타리나에 거주하고 있다. 이씨는 남편인 고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1968)과 ‘하녀’의 상영을 맞아 32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 영화팬들에게 전설로 인식되는 ‘하녀’는 해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는 작품이다. 어느 하녀(이은심)가 음악 강사인 동식(김진규)의 집에서 일하다가 동식과 관계를 맺은 뒤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당대 한국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계층의식을 보여주며 중산층의 위선을 저격한다. 이씨는 동식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하녀 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내 오래도록 영화 팬들의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저는 당시 김기영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연기를 했을 뿐이고 강렬한 음악과 촬영 효과 덕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데뷔작 ‘조춘’(1959)부터 주연급으로 활약한 이씨는 서른이 안 돼 은막을 떠났다. “연기에 대한 자신도, 능력도 없어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이씨는 말했다. “어느 영화 촬영 중에 감정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자 상대 배우가 ‘어떻게 ‘하녀’에 출연했었냐’며 화를 냈던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저는 예쁘지도 않았고 키도 작아 영화배우가 될 만한 외모가 아니었다”고도 했다. “영화인들이 많이 가는 다방에 친구랑 놀러 갔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어 운 좋게 배우가 됐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씨의 딸 이양희(50)씨는 “아버지가 연기를 못한다고 혼을 많이 내셨고 그래서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거들었다.
‘하녀’는 여러 차례 새롭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0년엔 임상수 감독의 동명영화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씨는 2010년작 ‘하녀’를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봤다’며 “제가 찍었을 때보다 연기도 잘하고 영화도 훌륭한데 감동은 별로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씨는 32년 만의 귀환에 만감이 교차한 듯했다. “영화제를 와 보니 나이 든 배우는 다 죽고 저와 신성일씨만 와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력이 쇠퇴해 신씨도 처음엔 못 알아봤다”며 “운동을 많이 해서인지 신씨는 젊은이처럼 행동하며 다니더라”고 부러움을 표했다. 이씨는 “부산영화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이가 있으니까”라는 게 이유였다. “부산에 와서 ‘고 김진규씨를 뵈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씨가 ‘하녀’ 찍을 때 후배인 저에게 화를 내지 않고 잘 달래며 연기지도를 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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