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당면한 과제는
기업들 협업·다양성 수용 따라 혁신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 과도한 수준
청년 일자리 창출 사회적 합의부터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1월. 불확실성이 몰려오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 대비하고 기업의 지속 성장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국내 한 포럼에서 세계적인 경영전략 전문 컨설팅그룹 AT커니의 폴 로디시나(67ㆍ사진) 명예회장은‘시나리오 플래닝’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로디시나 명예회장은 40여년간 유엔과 미국 정부, 연구소, AT커니에서 근무하며 통독 당시 민영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세계 30여개국의 공공 및 기업들의 리스크 관련 업무를 수행한 세계적인 시나리오 플래닝 전문가로 손꼽힌다. 시나리오 플래닝이란 기업이 불확실한 도전에 맞서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고 복잡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시나리오 경영전략을 말한다. 국내 경영학계 내부에서 일부 언급되기도 했지만, 대외적인 공식 석상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이 소개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1970년대 초 세계적인 정유업체인 로열더치셸이 급변하는 석유 가격 등 미래 상황을 예측하고 시나리오를 통해 대응책을 강구하는데 활용되면서 처음 알려졌다. 이 회사는 이를 통해 석유파동 위기를 이겨냈고, 그 후 시나리오 플래닝에 대한 연구는 미국 스탠퍼드 연구소(SRI)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으로 펴져 나갔다. 독일 화학 회사인 BASF와 국내에선 SK이노베이션 등이 이를 주요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7년 전 기자는 포럼에서 로디시나 명예회장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시나리오 플래닝이 미래에 대한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1차원적 예측이 아닌 탄탄한 상상력과 철저하게 조사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해 출간된 그의 저서‘초 복잡성 세계의 생존전략’(Beating The Global Odds)을 읽으며 그의 통찰력과 논리가 7년 전보다 더 탄탄하게 진화했다는 점을 실감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초청으로 지난달 롯데 마케팅 포럼‘변화’(Shift)에 연사로 참석한 그를 다시 만나 불확실성과 초 복잡성 시대에 한국경제가 꼭 풀어야 할 과제와 대응책,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대비해 적응력을 높이기 위한 시나리오 플래닝의 방법론에 대해 들어 봤다.
-중국 경제가 저성장 늪에 빠지고 미국 금리 인상도 단행될 조짐이다. 글로벌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복잡성이 증대되면서 경제인들의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렇다. 글로벌 경제 환경은 복잡해지고 있다.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스피드와 복잡성, 역설(패러독스)이다.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의 확산으로 사람과 물품, 돈, 소통 등의 국경 간 이동은 상호 연결성을 강화하고 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전염만 봐도 국경을 넘어 확산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실감할 정도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과 중동 ISIS(이라크ㆍ시리아 이슬람국가)의 테러리즘, 동중국해 영토분쟁 등 지정학적 위험요인들은 상존한다. 또 이익집단들의 입김은 더 커져 정부 정책에 큰 변수이다. 여기에 기술의 발전은 그 변화의 속도를 배가한다. 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위기는 역설적으로 다른 곳엔 기회가 된다. 이같이 다양한 변화 동인들이 만들어 내는 초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다. 적응력이란 변화하는 미래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다양한 전략과 대응조치를 적극 실행하는 역량이다. 미래를 대비하는 경제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반기 글로벌 경제 전망은.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전하고 있다. 유럽은 부진에 늪에서 깨어나고 있고, 일본은 아베노믹스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반면 중국의 성장세는 크게 꺾이기 시작했다. 다만 중국이 겪고 있는 진통은 장기적으로 약이 될 것이다. 또 과거에 주목받던 신흥국가들은 잇따라 추락하고 있다. 올 하반기 세계 경제는 암울할 것이다. 불안정성은 더 커질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 같은 세계 경제 흐름을‘새로운 평범함(New Mediocrity)’이라고 불렀다. 앞으로 세계는 저성장의 뉴노멀 시대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시나리오 플랜 짜려면
미래 예측보단 정보 정확도 높여
세계화·인구변화·기술변화 등 주목
실행 가능한 대안적 경영전략 마련
-뉴노멀 시대인 향후 5년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과제 5가지와 그 대응책은.
“무엇보다 빠른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 수출 감소와 저성장 등 도전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려면 빠르게 변해야 한다.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첩성과 유연성, 적응력이다. 한국은 유연하게 미래의 흐름을 좇아야 하고 기업들은 혁신을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혁신은 협업과 다양성에 기초한다. 과연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협업할 수 있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을지에 따라 혁신 속도는 달라질 것이다. 노동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 수준이다. 비정규직 직원들이 기업 성공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할 것으로 낙관하기 어렵다. 기업의 지속 성장을 위해선 노동자와 상생 협력이 필수조건이다. 정부가 민간 부문과 협력해야 할 부분도 그것이다. 또한, 인재들을 길러내고 재능을 키워 주는 산학 및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연구개발 협업도 필요하다. 풍부한 자원이 없는 이상 인재 개발을 통한 지식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또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연금제도 기반은 미흡한 수준이다. 청년실업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우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통일을 염두에 둔 다각적인 시나리오를 만들어 통일 후를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통일 비용은 물론 통일 후 보다 원만하게 화학적 결합을 유도할 수 있는 세밀한 전략 강구와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통일을 대비한 정부와 기업, 국민 간의 사회적 합의점을 미리 도출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고 본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많은 국가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태어난 세대)’들은 사면초가 상태이다. 일자리는 구할 수 있을지, 돈은 벌 수 있을지, 결혼과 주택 마련은 가능할지 앞날을 확신할 수 없는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민을 풀어 줄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간의 협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성장이 정체된 기업이 청년 고용을 확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정부 역시 산하 기관을 통한 고용이 이뤄지지만 돈벌이가 되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기엔 역부족이다. 기업들이 임금피크제 도입을 통해 신규 고용의 여지가 생겼지만 이 역시 제한적이다. 결국 근본적인 접근을 통해 정부와 기업, 노동자 간의 국민적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사회가 미래 세대에 투자하는 것이란 믿음, 바로 신뢰감과 책임감이 더해질 때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이 식어가고 있다. 일부에선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부활과 중국의 빠른 추격으로 이들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이기도 하다. 어떤 대책이 필요한가.
“한국은 이제 대기업 중심의 제조업 국가에서 한 단계 점프해 지식 산업국가로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만큼 인재의 역량이 중요한 부분이다. 무엇보다 다양성과 협업을 통한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바이오테크 등 새로운 기술 산업을 육성해 나가야 한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공공부문의 혁파ㆍ창업 벤처생태계 조성ㆍ서비스 산업의 규제개혁)과 노동개혁은 반드시 이뤄야 할 중요 현안이다. 이를 위해선 공공기관과 민영기업 간의 협력이 원활히 이뤄져야 한다. 중국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이나 경쟁의식은 오히려 큰 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잃게 할 수 있다. 한국기업이 협업을 잘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이나 노하우를 뺏길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내주지 않고 새로운 것을 얻을 수는 없다. 한국은 지금 중간에 낀 불편한 상태이지만 지금까지 고성장을 달성해 온 점에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이제 다음 단계로 성장 점프하기 위해 미래를 내다보고 혁신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성장성이 정체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들 기업의 고민은 기존 규모의 경제를 유지하면서 과연 어떻게 민첩하면서도 유연하고 도전적으로 사업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러나 피터 드러커의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경영 위기의 근본원인은 실행을 못 해서도, 잘못된 계획을 수립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조직 운영을 위해 세운 기존의 가정들이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기업 운영을 위해 세운 가정들은 조직의 행동을 결정하고,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이들 가정은 주로 시장에 관한 내용이다. 기업은 고객과 경쟁자가 누구이며, 그들의 가치와 행동이 무엇인지를 가정해야 한다. 기술과 기술 변화의 방향은 물론 회사의 강점과 약점, 여기에 적절한 수익 확보 방식에 대해 지속해서 새 가정들을 만들어 가야 한다. 즉 조직을 움직이는 가정 자체가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근본적인 원인은 유연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이에 대응할 섬세한 관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 임직원이 비전과 목표의식을 통해 공유하면서 민첩하고 직관적이며 실용주의적으로 전략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
-10년 전인 2005년‘글로벌 경영환경 10년 후 시나리오’(World Out of Balance)라는 책을 집필했다. 10년 전 시나리오를 스스로 평가한다면
“나는 당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기보단 다가올 미래의 일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는 큰 호황기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이란 책을 통해 인류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로 진보의 종착점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시대 흐름과는 달리 역설적으로‘지금 세상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제인들이 앞으로 고민해야 할 복잡성이 증대될 다양한 미래 변화의 동인들과 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강조했다. 사실 나는 내 주장이 틀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지난 10년간 그 변화는 실제로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세상이 균형 잡힌 상태로 돌아가기 보단 더 큰 격변의 시대로 흘렀다. 역사의 종언이 아닌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내가 활용한 시나리오 플래닝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었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또 부정적인 다수의 가능성을 시나리오 분석을 통해 경제인들이 대응전략을 스스로 찾게 함으로써 미래가 실제로 펼쳐질 때 기회를 잡거나, 위기에 대응하는 적응력을 키워주는 것이 목표였다. 지금 보면 미래를 대비하는 인간의 노력이란 측면에서 큰 과오는 없었다고 판단한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 시나리오 플래닝의 다양한 활용도
전략 플랜 창출에 기여
조기 경보 시스템
스트레스-테스팅과 대체 전략플랜 구성
리스크 관리
조직 정렬
외부 이익집단과의 소통
-미래 예측이란 ‘신의 한 수’인데, 시나리오 플래닝을 정의한다면.
“시나리오 플래닝은 더 빨라지는 변화 속도, 증대하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의 맥락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목표로 한다. 과거도 현재도 모두 하나만 존재하지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무수히 많다. 우리가 현재 그리고 있는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고, 실행할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방법론적인 기술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미래를 예측하기보단 현재에 대한 정보의 정확도를 높여,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대응 가능할 수 있는 대안적인 미래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형태이다. 나는 근본적인 변화 동인으로 5대 요소를 사용해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 플랜을 구성한다. 우선 각국의 경제시스템과 문화의 상호 연결성에 기반을 둔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 정도가 첫 번째 기준이다. 둘째로 인구 변화와 이에 따른 사회의 변화도 중요한 척도가 된다. 다음으로 소비자의 수요와 태도, 생활양식의 변화와 이에 대한 기업의 대응 정보를 포함한 소비자 성향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 밖에 천연자원과 환경, 이익집단이 영향력을 미치는 정부의 규제와 활동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변화이다. 이 모든 요소를 기반으로 한 시나리오 플래닝을 통해 각종의 트렌드 변화를 고려할 경우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 행동을 수용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미래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주는 것이 바로 시나리오 플래닝이다.”
-내년 한국에선 총선이, 미국에선 대선이 있다.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기술 발달과 세계화 확산, 지정학적 변수, 인구변화, 이익집단의 영향력 강화 등으로 앞으로 5년간은 과거 어느 때보다 글로벌 환경이 급변할 것이다. 특히 국가이든 기업에 있어 리더십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복잡성이 넘쳐나는 시대에 직관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다루기 힘들고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통찰력도 필요하다. 정부나 기업, 사회의 리더에겐 조직을 효과적으로 또 목표지향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영감을 불어넣는 재능이나 의지도 있어야 한다. 또 연대를 강화해 줄 용기와 비전도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변화 동인과 기술이 만들어 내는 초 복잡성의 세계를 가치와 혁신을 기반으로 대담한 정치적 의사결정과 민첩한 실행력을 보일 수 있는 리더십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
장학만 선임기자 trendnow@hankookilbo.com
■폴 로디시나 AT커니 명예회장은…
1948년 출생한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시카고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정부혁신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조 바이든 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수석보좌관을 지냈다. 1991년 AT커니에 입사 전 스탠퍼드 연구기관인 SRI에서 연구소장을 역임했고, 이후 컨설턴트로 24년간 활동하며‘시나리오 플래닝’의 대가로 명성을 높였다. 2006~2012년 AT커니 글로벌 회장을 역임한 그는 2005년과 2007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 25인’으로 선정됐다. 국내에선 산업자원부가 주관한 ‘2015 산업발전 비전과 전략’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AT커니가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미래 경영환경 예측 정보를 제공하는 글로벌 경영정책협의회(GBPC)의장 겸 AT커니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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