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율 상한은 남 얘기
업자가 부르는 게 곧 이자율
年 2900억 수백%에 빌려주고
수입의 5%만 축소 신고도
대형사건 전엔 실소득 '깜깜'
피도 눈물도 없다
"한번 봐주면 돈 떼이기 십상"
그 어떤 절박함도 안 통해
돈냄새 맡은 협잡꾼들 득실
비정함·음모가 판을 치는 세계
2012년 1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직원 수십 명이 ‘명동 사채왕’ 최진호(61)씨의 서울 여의도 자택과 사무실, 친인척 집 등 10여 곳에 들이닥쳤다. 국세청은 최씨의 비밀금고를 확인해서 업체 100여 곳과 금전거래를 했던 장부와 통장 등을 확보했다. 최씨는 급전이 필요한 업체에 며칠만 빌려주는 조건으로 수십억~수백억 원을 융통해주고 수억 원씩 이자로 챙겼지만 세무당국에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다. 당시 명동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남 일 같지 않다”며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고 한다. 최씨는 조세범처벌법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최씨 사례는 불법과 탈세의 담장 위를 걷고 있는 사채업계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차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에도 사채업자들이 섣불리 양지로 못 나오는 이유도 털면 ‘걸릴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세무신고는 고무줄
‘러시앤캐시’ 같은 제도권 대형 대부업체가 아니더라도 음지에서 움직이는 사채업자들도 당국에 사업자 신고는 한다. 문제는 얼마나 성실하게 이자 등 소득 신고를 하느냐다. 명동에서 만난 50대 전주(錢主)는 “내가 얼마를 신고하는지는 특급비밀이다. 다른 전주들은 보통 소득의 20~30% 정도만 신고한다”고 귀띔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대부중개업자는 “10억 빌려주고 한 달에 2% 이자로 받는다고 치자. 그럼 0.5~1% 정도만 신고한다. 그게 이 바닥의 룰”이라고 전했다.
한때 명동 사채시장에서 세무신고 업무를 맡았던 한 인사는 “세무신고는 고무줄이라고 보면 된다. 신고금액이 너무 오르락내리락 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수익규모와 향후 신고금액까지 고려해 마음대로 조절한다”고 전했다. 서류조작을 통한 축소신고 방법에 대해 함구했지만 “이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되는데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다”고 했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한 사채업자의 2007~2008년 거래기업 목록을 살펴보면 일반 제조업체부터 정보통신기업, 엔터테인먼트, 건설회사, 저축은행, 벤처업체 등 거의 모든 업종의 46개 기업(사진에는 28개 기업만 표시)이 사채자금을 썼다. 기업들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한 달 동안 유상증자 및 회계감사에 대비한 분식회계 용도로 돈을 빌렸다. 구체적으로 기재된 금액(23개 기업에서 빌린 돈)만 2,902억원에 달했다. 사채업자들은 보통 100억원을 빌려 주면 1일 기준으로 2,000만원을 이자(연 72%)로 받지만, 많게는 5,000만(180%)~7,000만원(252%)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 이 사채업자는 벌어들인 수입의 5% 정도만 신고했다는 게 지인들의 설명이다.
2002년 이자율 상한을 규정한 대부업법이 제정된 후 연 66%에 달하던 최고 이자율이 계속 내려가 지난해에는 34.9%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사채업자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율 상한이 실제 거래에서 실효성이 없기 때문에 10%대로 내려도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까지 나온다. 특히 급전이 필요한 기업이나 사업가들에게 사채업자가 부르는 게 이자라는 것이다. 명동의 한 대부중개업자는 “이자율 상한보다도 제도권 대부업의 성업과 정부 정책자금 등으로 일감 자체가 줄어드는 게 더 걱정거리”라고 말했다.
쫓고 쫓기는 탈세조사
그렇다면 세무당국은 어떻게 사채업자의 탈세를 적발할까. 사채를 빌려 쓴 기업의 재무제표 등에는 출처불명의 거금이 기재돼 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노하우가 축적돼 웬만한 속임수는 잡아낼 수 있다. 금융정보분석원(FIU)을 통해 이루어지는 2,000만원 이상 금융거래 감시도 탈세적발에 도움이 된다. 전직 국세청 관계자는 “유상증자나 인수합병 과정에서 사채업자 돈이 흘러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수상한 거래는 모두 감시한다”며 “사채를 빌려 쓴 기업을 압박하면 돈의 출처를 밝히는 경우가 종종 있고, 대부중개업자가 숨겨진 거래를 실토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채업자가 소득신고 때 누락시킨 금전거래를 당국이 자세히 알 방법은 거의 없다. 벌어들인 총액을 세무당국에 신고토록 돼 있고, 돈을 빌린 쪽에서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내밀하게 사채업자 돈을 융통한 것이라 사채업자 탈세를 신고할 가능성은 없다.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전주로 불리는 큰 손들은 대리인을 내세우거나 차명거래를 하기 때문에 서류상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아 대형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탈세를 적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사채업자들의 움직임도 재빠르다. 서울 신사동의 한 대부업자는 “대부업체들이 몰려 있는 명동이나 을지로, 신사동 부근 은행에서 개설한 통장은 세무당국의 타깃이 되기 쉽기 때문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통장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비정함과 음모로 얼룩
음성적 거래가 판치는 탓에 사채시장에서는 황당한 사기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예기치 않은 소송으로 비화하는 경우도 있다. 전주(錢主)와 짜고 구권화폐를 수백억 원 이상 가지고 있다며 돈이 입금된 통장을 보여주며 유력인사와의 교제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사기꾼들도 있다. 매정한 인간관계가 유지되는 사채시장의 특징에 대해 은퇴한 한 70대 사채업자는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설명했다. “5,000만원을 빌려간 의뢰인이 네 살짜리 딸이 아파서 한 달 뒤에 갚겠다고 사정했지만 단칼에 ‘안 된다’고 내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지만 그게 이 바닥 생리다. 한번 봐주기 시작하면 돈 떼이기 십상이고 의뢰인도 사채업자를 만만하게 보게 된다."
20년간 명동에서 일하다 최근 신용정보업을 하고 있는 사업가도 “비정함과 음모가 판을 치지만 이 바닥도 결국 신뢰가 자산이다. 욕심을 부리면 꼭 사고가 터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채시장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게 업계 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5년 전 명동에서 발을 뺀 40대 사채업자는 “이 곳은 온갖 협잡꾼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항상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일하는 게 싫어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강철원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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