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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행운이었나… 끝내 단죄 피한 킬링필드의 '여왕'

입력
2015.10.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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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집안서 자란 엘리트, 판사 아버지에 명문 교육

파리 유학 중 만난 남편 통해 크메르루주 실력자들과 친분

잔혹한 여성 개조 정책 주도… 남성과의 기계적 평등 추구

학살 40년 지나 법정 섰지만 결백 주장, 검찰 저주도… 가석방 된 뒤 천수 누려

크메르루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권 중 하나였지만 1인 독재정권은 아니었다. 폴 포트 휘하에는 ‘농촌 유토피아’의 이념을 공유하고 실천한 이데올로그와 수족들이 포진해 있었고, 내무부장관 이엥 티릿은 사회와 가족 개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책임자였다. ●www.eccc.gov.kh 자료
크메르루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정권 중 하나였지만 1인 독재정권은 아니었다. 폴 포트 휘하에는 ‘농촌 유토피아’의 이념을 공유하고 실천한 이데올로그와 수족들이 포진해 있었고, 내무부장관 이엥 티릿은 사회와 가족 개조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책임자였다. ●www.eccc.gov.kh 자료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여성 권력자 이엥 티릿(Ieng Thirith)이 83년 천수를 누리고 8월 22일 숨졌다. 폴 포트(Pol Pot) 정권의 사회부(내무부)장관이던 그는 사회 개조와 여성 해방의 이름으로 잔혹한 젠더 정책을 주도했고, ‘반혁명분자’ 숙청의 폭을 넓히는 데 결정적으로 개입했다. 부총리겸 외무부장관 이엥 사리(Ieng Saryㆍ2013년 사망)의 아내이자 폴 포트의 처제였던 그는 캄보디아 ‘4인방’이라 불렸고, 폴 포트가 언니 키우 폰나리(Khieu Ponnaryㆍ2003년 사망)와 이혼한 뒤로는 ‘퍼스트 레이디’로 폴 포트 곁에 서곤 했다. 국가주석 키우 삼판(Khieu Samphanㆍ84)과는 일가(이엥 티릿의 결혼 전 이름은 키우 티릿이었다)였다.

2007년 유엔 캄보디아 특별법정재판(ECCCㆍExtraordinary Chambers in Courts of Cambodia)의 전범으로 2인자 누온 체아(Noun Cheaㆍ89)와 키우 삼판, 이엥 사리 등과 함께 기소됐지만 끝까지 자신의 결백과 정당성을 주장했고 법정에서 검찰을 저주하기도 했다. ECCC는 2012년 9월 중증 치매로 기억을 잃은 그를 가석방했다.

크메르루주는 순수 이념이 어떻게 광기로 변질되는지, 유토피아 권력이 얼마나 야만적일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정권이었다. 1975년 4월 친미 우파 론놀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뒤 79년 1월 베트남군에 의해 패퇴하기까지 약 3년 9개월 동안, 크메르루주는 캄보디아 800만 국민의 약 20~25%인 160만~200만 명을 학살했다. 고문과 처형 강제이주 강제노동 아사 영양실조 등 원인은 다양했지만, 그들에게 그 모든 죽임과 죽음은 ‘사회주의 농업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불가피한 대가일 뿐이었다.

이엥 티릿은 1932년 3월 10일 캄보디아 북서부 밧탐방(Battambang) 주 판사의 두 딸 중 차녀로 태어났다. 다양한 특권을 누리며 유복하게 자란 그는 프놈펜 명문 중등학교인 리세 시소왓(Lycee Sisowath)을 졸업하고 언니 폰나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알려진 바, 그는 소르본느에서 영문학(세익스피어 전공)으로 학위를 딴 최초의 캄보디아인이었다. 51년 파리에서 사리와 결혼했고, 그를 통해 당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훗날의 크메르루주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는다. 국비장학생으로 유학 중이던 폴 포트(전자공학 전공)와 키우 삼판(경제학 전공), 훗날 크메르루주의 국방장관이 되는 손 센(Son Sen) 등과 함께 티릿은 왕정 폐지와 평등한 공산 사회의 이상을 품는다. 이엥 부부는 57년 귀국 후 잠깐 교사로 일했고, 60년 영어전문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앞서(53년) 귀국한 폴 포트의 당시 직업은 프랑스어 교사였다. 폴 포트는 56년 폰나리와 결혼했다. 65년 이엥 부부는 폴포트 등과 함께 북베트남의 영향력 하에 있던 캄보디아 동부 밀림으로 잠입,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50, 60년대 그들의 열정은 순수하고 정의로웠다, 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의 시민들은 초대 수상이 된 옛 왕가의 후손 노로돔 시아누크의 독재와 부패, 비밀경찰을 앞세운 반대파 숙청 등 공포정치에 시달려야 했다. 70년 친미 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론놀 정권(크메르공화국)의 부패와 학정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좌우파를 동시에 견제했던 시아누크 때와 달리 론놀 정권의 좌익 탄압은 극심했다. 공산반군의 머리를 잘라오면 보상을 해주는 정책도 그 중 하나였다. 보상금을 노린 무고한 살인이 빈발하자 정권은 머리 외에 소총 등 무기를 함께 가져와야 보상하도록 규정을 바꾸기도 했다. (‘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당시의 캄보디아는 론놀을 앞세운 미국과 폴 포트를 앞세운 베트남(집권 후엔 중국)의 전장이나 다름 없었다.

폴 포트의 캄보디아 공산당을 키운 최대 공로자는 미국이었다. 베트남전쟁 막바지 미국은 B-52 폭격기를 동원해 호치민 루트였던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무차별 폭격해 약 60여 만 명을 학살했다. 그 시기 크메르루주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교훈을 본받아 과일을 따더라도 나무둥치에 돈과 메모를 남겨두는 식으로 농민들의 인심을 샀다. 73년 미군의 인도차이나 철군으로 벗바리를 잃은 론놀 정권은 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주에 의해 괴멸됐다. 유토피아의 대살륙, 킬링필드의 무대가 그렇게 열렸다.

폴 포트 통치 이념은 유학시절 프랑스공산당 핵심이념이던 스탈린주의와 농업 위주의 조국 현실에 근거한 마오쩌둥주의, 금욕과 절제의 소승불교적 계율이 이룬 최악의 조합이었다. 그들에게 도시는 자본주의와 친미 권력의 온상이었다. 그들은 반군 지지기반이던 농촌을 중심으로 순수한 사회주의 평등사회를 지향했다. “프놈펜은 돈 때문에 망가졌다.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봐야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위 책 517쪽) 폴 포트 정권은 집권 한 달 뒤인 5월 20일 ‘긴급현안 8개항’을 발표한다. 시장 및 통화 폐지와 승려직 폐지, 론놀 정부 고위관료 처형 등이 포함된 ‘현안’ 제1항이 도시 인구 소개(疏開)였다. 250만 명에 달하던 프놈펜 시민 절반 이상이 한 달도 안 돼 농촌으로 내몰렸고, 환자나 노인, 유아, 만삭의 임부도 예외가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이주 도중 기아와 질병으로, 또 집단농장 강제노역으로 숨졌다. 지식인 압살정책도 병행됐다. 교수 의사 할 것 없이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들은 ‘재교육’대상자로 몰려 투옥되거나 처형됐다. 안경을 썼거나 손바닥에 굳은 살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처형 당할 이유가 됐다.

이엥 티릿은 집권 이듬해인 76년, 지역 보건 실태를 비롯한 혁명 성과와 과제를 조사하기 위해 캄보디아 북서지역을 시찰한 뒤 보고서를 발표한다. 요지는 반혁명 세력이 농촌지역 전역에 스며들어 인민의 건전한 사상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거였다. 그의 보고서는 숙청의 광풍을 론놀 정권의 하수인과 도시민ㆍ지식인을 넘어 농민과 크메르루주 조직 내로 확산하는 근거가 됐다. 학살박물관으로 불리는 저 악명 높은 투올 슬렝(Tuol Slengㆍ정식명칭 보안형무소 제21호) 감옥의 죄수 1만7,000여 명 대다수는 옛 동지였던 크메르루주 조직원이었다.

티릿의 여성개조ㆍ가족개조 정책은 저열한 이념의 표본이었다. 그들은 봉건적 가부장제와 가사 및 육아노동으로부터의 여성 해방을 위해 먼저 여성을 가족과 자녀로부터 ‘독립’시켰다. 독신 여성은 부모로부터, 기혼 여성은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강제로 분리됐다. 태어난 지 한 달, 심지어 1~2주일 만에 아이를 떼어놓아야 했던 여성도 있었다.(Phnon-Penh Post, 2015.8.25) 병원에 못 가(의사가 없어) 숨지는 임산부가 허다했고, 임신 중에도 출산 직후에도 노동이 면제되지는 않았다. “이엥 티릿의 ‘성평등’은 여성주의적 평등이 아닌 체력과 정신력의 기계적 평등이었다. 남성과 똑같은 노동을 똑 같은 양 만큼 수행해야 했다.”(위 신문) 반혁명분자 처단에 동원된 학살 기술자 상당수도 여성이었다.

국가 전체는 사실상 수용소였다. 78년 이후 완화되긴 하지만, 국민은 누구나 검정색 계열의 옷만 입어야 했고, 어디서 자고 무얼 먹고 누구와 결혼할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결혼식은 정부 기관이 허가한 커플에 한해 최소 10쌍이 모인 뒤 정부 주관으로 치러졌다. 그 모든 정책의 입안ㆍ집행 주무 부처가 사회부(내무부) 곧 이엥 티릿의 소관 업무였다.

78년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국교를 단절한다. 국경분쟁이 단초였으나, 이면에는 중-월 분쟁이 가로놓여 있었다. 베트남으로선 크메르루주 친중 정권을 등뒤에 둘 수 없었다. 베트남은 79년 1월 캄보디아를 전격 침공, 보름 여 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다. 폴 포트 등은 정권의 주요 자금원이던 북서부 파이린 보석광산 밀림으로 퇴각, 다시 게릴라가 된다.(중국-베트남 전쟁은 79년 2월 시작돼 약 한 달간 지속됐다.)

크메르루주의 장교였다가 77년 숙청을 피해 베트남으로 망명했던 헹삼린, 훈센 등은 점령군으로 프놈펜을 장악,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공화국 중앙ㆍ지방 정부 요직에는 크메르루주의 잔당들이 대거 포진했다. 학살로 인한 인력 공백과 지도부의 인맥이 과거 청산 불가의 배경이었다. 폴 포트 게릴라는 1999년까지 활동했지만, 정권을 재탈환할 만한 역량을 갖추진 못했다. 93년 UNTAC 감시 하에 치러진 총선에 불참한 이후, 96년 이엥 사리-티릿 부부는 휘하의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훈센 정부에 투항했다. 그들은 즉각 사면된 뒤 프놈펜 남부 21번가 호화 저택과 그들의 근거지 파이린 등을 오가며 평온하고 여유롭게 살았다. 폴 포트는 2년 뒤인 98년 부하들에 의해 가택 연금 당한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뒤를 이어 반군을 이끌던 타 목과 키우 삼판도 98년 훈센 정부에 투항, 크메르 루주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엥 티릿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붕괴한 지 28년 만에 유엔 캄보디아 특별법정 피고석에 앉았다. 그는 인민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다며 고문과 학살 혐의를 부인했다.
이엥 티릿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붕괴한 지 28년 만에 유엔 캄보디아 특별법정 피고석에 앉았다. 그는 인민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다며 고문과 학살 혐의를 부인했다.

캄보디아 의회가 크메르루즈의 동족 학살 심판을 의결한 것은, 권력을 잡은 지 20여 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미적대던 캄보디아 정부를 설득해 유엔과 캄보디아가 공동 국제재판소 설립에 합의한 것은 2003년이었고, 심문이 시작된 것은 4년 뒤인 2007년이었다. 첫 재판은 또 2년 뒤인 2009년에야 열렸고, 심판대(사건번호 001)에 처음 세워진 것은 투올 슬렝 형무소장 카잉 구엑 에우(Kaing Guek Eav, 1942~)였다. 1만7,000명 학살 책임자이자 집행자였던 그는 자신을 “당의 기술자”일 뿐이라고 말했고, 기술자일 뿐이어서 심판에 따르는 정치적 부담이 덜했다. 그는 2010년 말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엥 사리- 티릿 부부와 누온 체아, 키우 삼판 등 4명은 2011년 11월 시작된 ‘제 002호 사건’의 피고였다. 티릿은 학살과 고문 외에 대규모 강제 이주를 “계획하고 지시하고 협력하고 명령한”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그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거나 폴 포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티릿은 자신은 인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죄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왜 (나 같은) 선량한 사람이 그런 범죄로 기소를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잘못된 기소로 이미 큰 고통을 당했고, 더 이상 옥살이를 견딜 수 없다”고 말했고, 검찰을 향해 “구천 지옥을 떠돌게 될 것”이라고 저주하기도 했다.(abc, 2015.8.22)

크메르루주의 잔악행위 독립 조사기관인 ‘캄보디아 기록센터’의 요우크 치항(Youk Chhang) 대표는 “이엥 티릿은 폴 포트나 이엥 사리 등과의 혈연ㆍ인척 관계로 제 행위를 변명할 수 있을 만큼 수동적인 개인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내무부 장관으로서 직접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실력자였다”(AFP)고 말했다. 증언대에 선 한 망명자(Ong Thong Hoeung)는 “티릿은 스스로 진보주의자로 자처했지만 행위와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적이었고 심지어 봉건적이었다. 그녀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여왕처럼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엥 사리는 판결 전인 2013년 3월 고혈압과 심장질환 합병증으로 숨졌다. 향년 87세.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2014년 8월 종신형을 선고 받고 항소했다. 참모총장 급 군 간부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지만, ECCC가 표방한 국제 정의의 심판은 이제 알맹이 없는 종반으로 접어들었다.

훈센 정권은 재판부 구성에서부터 재판 절차 내내 ECCC 활동에 미온적이거나 비협조적이었다. 그는 2010년 이미 기소된 6명 외에 추가 기소는 없다고 공식 천명한 데 이어 지난 3월 유엔이 임명한 판사가 추가 용의자를 기소하자 체포 영장 집행을 거부했다. 외신 회견에서 그는 “재판이 확대될 경우 국민을 다시 정글로 내몰아 내전이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당장 발 밑이 불안하고, 등 뒤에 있는 중국(크메르루주의 최대 후원자였다)의 심기도 살펴야 했을 테다. 그의 항변 중에는 “베트남 전쟁 기간 폭격을 지시한 키신저를 비롯한 미 정부 관료들도 함께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엥 티릿의 장례식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8월 24일 치러졌다. 화장 장작 더미에 불을 붙인 것은 파이린주 장관 케우트 소데아(Keut Sothea)였고, 그에게 횃불을 건넨 건 이엥 티릿의 아들이자 주 부장관 이엥 부스(Vuth)였다. 집권 여당 의원인 반 킴헹(Ban Kimhengㆍ52)은 “(티릿은) 가장 존경 받던 옛 동지였고, 훌륭한 조언자였다”며 “그가 어떤 혐의로 기소되었든 이 밤 고인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프놈펜포스트, 2015.8.25) 킬링 필드에 대한 캄보디아의 정의, 국제 사회의 정의가 그러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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