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開天)’은 ‘하늘을 열다’라는 뜻이다. 하늘이 스스로를 연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늘을 열었다는 말이다. 물론 하늘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도 열리는 그 정도의 존재일 리는 없다. 다만 ‘진인사대천명’처럼, 최선을 다한 누군가의 노력에 감응하여 하늘이 스스로를 열어줬다고 봄이 우리의 오랜 관념인 듯하다.
하늘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늘을 연다’느니, ‘하늘이 자신을 열어준다’느니 하자니 도통 민망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렇다고 지난 시절, 적잖은 이들이 하늘을 열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폄훼할 수도 없다. 특히 치세(治世)를 향해 큰 뜻을 품었던 이들이 보여준 노력은 가히 기념비적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하늘을 여는 것은 민심을 여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는 2,400여년 전에 이미 “백성은 신의 주인이다”(‘춘추좌전’)는 명제로 정식화되어 있었다. 이를 따르면 신은 ‘개천’ 여부를 주인인 백성의 뜻에 맞춰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춘추좌전’의 저자 좌구명은 제대로 된 군주는 백성을 온전케 한 후에 신에게 정성을 다했다고 설파했다. 큰 뜻을 품은 이에게 ‘진인사대천명’은 결국 백성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후에 신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백성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바를 다 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나 가능했던 일일까. 온 백성이 똑같은 마음을 품는다면 혹 모르겠지만, 이는 그저 실현 불가능한 설정에 불과하다. 게다가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백성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지라, 저마다 딴마음을 품게 됨을 탓할 수도 없다. 이를 두고 좌구명은, 신이 주인을 잃어버린 꼴이며, 그렇기에 신에게 온갖 치성을 다 바쳐도 소용없게 된다고 일깨웠다. 백성이 각기 다른 마음을 품게 되면 신이 누구 마음을 주인으로 섬길지 갈피를 못 잡게 된다. 그러면 신이 하늘을 열어주고 싶어도 결재해줄 주인이 없어 말짱 헛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좌구명은 선정을 베풀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지내면, 신 곧 하늘이 주인을 되찾게 된다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오늘날에도 유용한 대안임은 분명하다. 다만 이는 민본(民本)이 지상이념으로 설정된 시대의 대안임에 유의해야 한다. 흔히 서구에 민주(民主)주의가 있다면 한자권에선 민본사상이 그에 해당된다며, 민본을 곧잘 민주와 연동시키곤 한다. 그러나 민본과 민주는 사뭇 다르다. 입으로는 민본을 연신 되뇌었지만 실제론 ‘대체로’ 사이비 민본이었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민본을 참되게 실현했던 성군들조차도 ‘민’을 정치의 주체로 설정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민’이 정치의 주체로 설정된 민주와 그것을 결코 유사하다거나 동일시할 수는 없게 된다.
설령 민본을 현대문명과 어울릴 수 있는, 가령 ‘민주적 민본’으로 개조해내도 민본은 여전히 민본일 따름이다. 민본이 못났다고 주장함이 아니다. 오늘날 하늘을 여는 정도(正道)는 민주의 참다운 실현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다짐코자 함이다. 민본으로 위장된 선심성 정책이나 시혜 따위에 하늘을 여는 힘이 담겨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이 바로 하늘을 열어주는 주체라는 오랜 진리를 다시금 새기고자 함이다. 아무리 ‘헬조선’에서 각자도생 하느라 저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도 ‘국민이 곧 하늘’이라는 마음만큼은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신이 주인을 되찾게 되고, 민주의 참다운 실현으로 국민 마음을 열려고 하는 이에게 하늘을 열어줄 것이다. 근대가 되기 전, 큰 꿈을 품은 자에게 ‘참다운 민본’이 하늘을 여는 힘이었다면, 오늘날 ‘참다운 민주’는 하늘의 주인인 국민이 자기 것인 하늘을 열어주는 이유다. 이 정도가, 도무지 하늘을 두려워 않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천절이 던지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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