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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입력
2015.09.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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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풍년이다. 먹는 사과(앱뽈) 말고, ‘미안하다’의 사과 말이다. 여론의 목소리는 매체의 발달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눈 막고 귀 막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눙치기 힘들어졌다. 공직자부터 연예인, 작가, 재벌가의 후계자까지, 당사자의 직위나 논란의 성질을 막론하고 다양한 논란과 사과가 넘쳐난다. 이 과정에서 사과의 여부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과하느냐의 문제이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조상은 사과의 달인이었을까? 어떤 사과는 본래의 의미를 배반하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며,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SNS에는 ‘사과문을 올바르게 쓰는 법’이라는 매뉴얼이 돌아다닌다. 피해야 할 표현과 들어가야 할 말이 정리되어 있는데, 아주 유용하니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피해야 할 표현 중 하나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이다. 그런데 이 말은 거의 대부분의 사과에 로고처럼 들어간다. 상대의 성별, 계급, 출신, 성적 취향, 학벌, 연령 등에 대한 차별 및 비하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른 경우 특히 그렇다. 방송인 유병재는 ‘본의 아니게’를 ‘예상과는 다르게’로 번역했는데, 이 역시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자신의 뜻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면 억울해진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전달 과정에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고 해명하려고 할수록, 사과는 산으로 간다. 왜냐하면 차별이나 비하 발언은, 정말로 당사자가 ‘그런 의도’가 없는데도 저지르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진흙탕 싸움판에서 실시간 인신공격이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문제 발언에는 누군가를 비하하겠다거나, ‘저 사람을 차별할 거야!’라는 의도가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조심하기 마련. 굳이 따지자면, 의도 자체는 오히려 선량하다. 재미있으라고, 상대가 모르는 것 같아서 가르쳐주려고, 빛나는 통찰력으로 사유의 사각지대를 포착하려고,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나 의도는 놀라울 만큼 의미가 없고 무력하다. 예쁜 리본을 묶은 칼로 선의를 담아 찌른다고 안 아프거나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듯. 좋은 의도에서 한 말에 사회의 편견이나 구조적, 정치적 불평등이 오겹살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면, 그것은 흉기에 불과하다.

그런 식의 차별, 비하 발언은 나쁜 의도가 아니라 오랜 기간 귀와 입에 밴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무심함에서 태어난다. 머리 그렇게 하면 동성애자 같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트리다, 그러다 나이 들어서 폐지 줍는다, 살찐 사람은 자기 관리를 못한다, 드세서 맞는다 같은 말들이 공기처럼 퍼져 있다. 사방에서 맞닥뜨리니 입에 올리는 것은 숨쉬기보다 쉽고, 왜 그것이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당연히 지적 받으면 발끈하고, 사과 상자에는 궤변과 변명이 차곡차곡 쌓인다. 심지어 지적한 이들에 대한 분노와 반발로 번지기도 한다. 의도와 달리 해석한 사람을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고 몰아붙이고 싶은 충동은 매우 힘이 세다. 그러나 문제는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말이 왜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부재, 그 공백에 있다.

나 역시 많은 실수를 했다. 상처 줄 의도가 없었음을 설명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 했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웠지만 언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 모른다. 완전히 무결한 인간은 불가능하고,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디서나 잘못된 발언이나 행동을 할 가능성으로 충만한 번데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잘못할 수 있고”, “아직 무지하다”라고 인정하며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의도를 괄호 안에 넣는 작업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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