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가 민심 살피는 이야기
궁중 무용인 태평무·진쇠춤, 팔도 전통춤과 함께 풀어내
440석 꽉 채운 마드리드 시민 "화려한 의상·춤에 매료"
28일 저녁 8시(현지시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의 테라드로스 델 카날 극장이 한국 전통 춤사위에 사로잡혔다.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에 맞춰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김서량(이몽룡 역) 백미진(성춘향 역)이 펼친 2인무에 연신 박수가 터져 나온다. 버선발을 들어 아장아장 마주 걷는 두 사람의 걸음은 마냥 수줍고, 춘향을 번쩍 안아 올리는 몽룡의 표정은 행복에 겨워있다. 부채를 활짝 펴 입맞춤을 가리는 마지막 장면, 객석에서 낮은 탄식이 쏟아진다. “브라보!” 과묵하기로 유명한 마드리드 관객들이 보내는 뜨거운 반응이었다.
국립국악원의 무용공연 ‘왕의 하루’가 스페인 가을밤을 적셨다. 국립국악원이 전통공연의 세계화를 위해 기획한 이번 무대는 막 책봉된 세자가 어명을 받들어 전국을 다니며 민심을 살피는 이야기를 팔도 춤과 함께 풀어냈다. 국악원이 무고, 진쇠춤, 살풀이춤, 설장고춤 등 우리 전통춤을 옴니버스식으로 재구성해 올 4월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11인 남무전 ‘궁의 하루’를 다듬어 혼성 12인무로 바꿨다.
“금일 책봉을 마친 세자가 첫 임무를 내리니, 세자는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의 문화를 두루 살피고, 이 나라 백성들의 희노애락을 보고 듣고 가슴으로 느끼고 돌아오라.”
왕실의 의례를 보여주는 전반부에는 대표적인 궁중무용인 무고, 가인전목단, 헌선도를 바탕으로 한명옥 예술감독이 재구성한 춤 ‘태평성대’를 시작으로 왕과 왕비가 직접 추는 태평무, 왕이 베푼 향연에서 고을 수령들이 췄던 진쇠춤이 이어졌다. 태평무를 추는 이지은(왕비 역)은 치마를 살짝 올려 버선발을 선보이다 발 빠르게 제자리에서 돌며 화려한 기품을 한껏 뽐냈고, 적역(赤易?왕의 신발)을 신은 박성호(왕 역)는 보다 투박하고 절도있는 걸음을 선보였다.
후반부는 전국 팔도의 전통춤 퍼레이드였다. 황해도 해서지방의 익살스럽고 경쾌한 봉산탈춤, 중부지방의 살풀이, 통도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신라시대 이후 전승되는 양산사찰학춤 등이다. 공연은 소고춤(경남 삼천포), 북춤(전남 진도), 설장고춤(충청)을 집대성한 피날레 ‘신명’에서 절정에 달했다. 자진모리 중중모리 장단에 맞춰 무용수들이 흩어졌다 모이고,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를 반복하자 객석에서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베르데홀 440석은 공연 열흘 전 일찌감치 매진됐고, 유료 점유율이 80%를 넘었다. 현지 티켓 가격은 12유로로 이 공연장의 평균 가격(20유로)보다 낮지만, 전통춤 해외공연이 교민동원 행사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아 문화원을 들렀다 공연을 관람한 대학원생 몬세라드 마스(25)는 “한국 영화감독들이 왜 예술적으로 뛰어난지 이번 전통공연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평소 동양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공연소식을 듣고 왔다는 미술교사 안드레스 코레아(53)는 “화려한 의상과 춤이 동양화를 연상시켜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채수희 스페인 한국문화원장은 “마드리드시가 운영하는 이 극장은 우리의 세종문화회관과 맞먹는 극장이다. 문화원도 유료공연 성공을 반신반의했지만 9월초 티켓을 오픈한 지 3주 만에 매진됐다”고 말했다. 공연은 독일 베를린 템포드롬극장(9월 24일), 마드리드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민속극장(10월 10일)로 이어진다.
마드리드=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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