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판에 그려진 무늬를 지우면 동그라미·세모·네모만 보여
'직장인 신용대출' 급전 광고와 철거현장 인력·파출부 모집 등
손바닥만 한 스티커 '덕지덕지'… 삶에 지친 사람들 시선 머물러
표지판 뒷모습은
동그라미ㆍ세모ㆍ네모의 '도형 세상'
거리마다 표지판이 빼곡하다. 횡단보도 표시부터 주정차금지, 좌회전금지, 유턴 등 교통안전 표지만 수백 종류에 이른다. 표지판은 눈에 잘 띄는 원색의 픽토그램과 간결한 문구를 앞세워 안내하거나 지시, 또는 경고한다. 운전을 하면서, 거리를 걸으며 반복되는 메시지의 과잉이 지겹다면 표지판에 그려진 무늬를 없애고 글씨를 지우는 상상을 해 보자. 시시콜콜한 잔소리 대신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만 보이는 세상, 표지판의 뒷모습이 만들어 낸 모양은 흥미롭고 덕지덕지 붙은 메시지는 또 다른 세상을 담고 있다.
'직장인 신용대출' 급전 광고와
철거현장 인력ㆍ파출부 모집 등
바쁘게 오가는 그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 공간, 표지판의 뒷면에는 화려한 정면과는 다른 메시지가 붙어 있다. 손바닥만 한 스티커를 매개로, 붙이는 이와 보는 이가 이 작은 면을 공유한다. ‘직장인 신용대출’, ‘무담보 무보증’…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느라 얼룩덜룩 남은 스티커 자국 사이로 급전 대출 광고가 흔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빌려 준다지만 자세한 상환 조건 대신 굵은 글씨로 강조된 전화번호만 눈에 들어온다. 철거현장의 일당 잡부나 음식점 허드렛일, 파출부를 모집하는 광고도 표지판 뒷면을 장식하는 단골이다. ‘큰돈 안 들이고 입주가 가능하다’는 식의 부동산 분양 광고가 나붙기도 하고 젊은 예술가의 자체 홍보용 큐알(QR)코드까지 등장한다. 도무지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횡설수설 낙서도, 세월호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호소도 대중의 시선이 비켜 간 무관심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버거운 삶을 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다급한 사정에 몰린 누군가는 오늘도 뒷골목 표지판의 뒷면을 훑고 있다.
손바닥만 한 스티커 '덕지덕지'
삶에 지친 사람들 시선 머물러
번화한 도시의 주변이자 반듯한 일상의 사각지대에 붙여진 작은 메시지 조각들은 이렇게 침울하고 불편한 현실을 증언한다. 깨끗하고 질서 있는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까닭에 끊임 없이 삭제되지만 이내 다른 메시지가 그 자리에 달라붙는다. 정면으로 세상을 향해 선 채 ‘양보(YIELD)’를 강요하는 표지판, 바로 뒷면에선 대출 광고 위에 뿌려진 회색 페인트가 눈물처럼 흐른다. 수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그 앞을 지나친다. 무심코 흐르는 도시의 행렬에 들어서자 빨강 파랑 노랑의 화살표와 경고문이 나를 노려보고 서 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최민영 인턴기자 (숙명여대 법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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