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ㆍ김종진ㆍ엄인호와 함께 무대
"관객 만날 생각에 설레고 감동적"
최근 집 처분하고 짐 대부분 버려
사무실ㆍ연습실 전전 '집 없는 삶'
“나 자신에게 주는 가혹하지만 달콤한 훈장이랄까요. 데뷔한 지 얼마 됐는진 신경도 안 쓰고 지냈는데 이번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숫자를 내세워봤습니다. 써놓고 보니 40이라는 숫자가 달콤하기도 하고 가혹하기도 하더군요.”
가수 한영애(60)가 10월 9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 ‘꿈 인 꿈’을 연다. 25일 서울 성북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이 공연을 간단히 “쉼표”라고 정의했다. 나이를 물을 때마다 매번 ‘스물여덟 딸기띠’라고 눙칠 만큼 숫자 세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가 40주년 기념 공연 제의를 받아들인 건 “지금까지 어떻게 발전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를 느껴서였다.
평소 공연에 초대 손님을 부르지 않는 그가 이번엔 해바라기의 이정선,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신촌블루스의 엄인호와 함께 노래한다. 처음 음악 활동을 시작했던 해바라기 시절 곡부터 ‘누구 없소’ ‘조율’ ‘건널 수 없는 강’ 등 주요 히트곡, 신촌블루스에 몸담고 있던 당시 불렀던 ‘루씰’까지 40년 음악인생을 망라할 예정이다.
한영애가 직업 가수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1975년 서울 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 해바라기홀에서 이정선 이주호 김영미와 함께 해바라기로 공연하면서부터다. 가수로 처음 무대 위에 섰던 40년 전의 공연을 그는 어떻게 기억할까. “원래 가수가 되고 싶었다거나 음악으로 내 인생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서인지 설렘이나 기대가 전혀 없었죠. 그저 노래하는 게 좋아서 공연하고 음반을 냈어요. 가수가 됐든 다른 형태의 일이든 무대 위에서 하는 일로 평생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건 솔로 앨범을 처음 내면서부터였습니다.”
한영애가 음악에 빠져든 건 친언니의 영향이 컸다. 초등학생 시절 중학생 언니를 따라 팝송을 흥얼거렸고 언니가 산 기타로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처음 불렀던 팝송이 어떤 것이었는지 물으니 “와이 더즈 더 선 고우 온 샤이닝~”(스키터 데이비스의 ‘디 엔드 오브 더 월드’)이라고 또박또박 가사를 읊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언니에게 한글 독음을 써달라고 졸라서 외운 가사다.
40주년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한영애는 “실제로 음악만 하고 지낸 건 20년쯤일 것”이라고 했다. 해바라기 탈퇴 후 한동안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하며 배우로 살았고 1985년 솔로 데뷔 이후에도 30년간 발표한 앨범이 리메이크 앨범을 포함해 7장뿐일 만큼 공백이 길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발표한 6집 ‘샤키포’는 15년 만에 낸 정규앨범이었다.
본의 아니게 음악을 그만둬야 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1993년이었어요. ‘아.우.성.’ 콘서트를 마친 뒤 연극 동인들과 함께 유럽 공연을 다녀오고 나서 갑자기 소리가 잘 안 나오는 거예요. 병원에 갔더니 기관지확장증이라고 앞으로 노래를 못할 수도 있다더군요. 앞으로 50년간 노래를 한다면 지금 1, 2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2년을 쉬었어요. 그 이후론 회사원처럼 밤 12시면 자고 아침 8시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삶을 살고 있죠.”
독신인 그는 얼마 전부터 ‘집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잠은 ‘숙소’에서 잔다. 사무실이 숙소가 될 수도 있고 연습실이나 호텔이 숙소가 되기도 한다. 살고 있던 집을 처분하면서 대부분의 짐도 버렸다. 이유를 물었더니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고 했다.
40주년 공연에선 평소 잘 부르지 않던 곡도 부른다. 3집 ‘한영애 1992’(1992년)에 담긴 ‘멋진 그대여’다. “40이란 숫자의 끝을 좇아가다 보니 설레고 감동적인 뭔가가 있더군요. 바로 관객이었습니다. 최근에 저를 안 분도 있겠지만 데뷔 때부터 저를 봐온 관객도 있지 않겠어요. 때론 저를 응원하기도 하고 때론 실망도 했던 분들. 음악이라는 매개가 없다면 제가 만나지 못했을 그런 분을 이번 공연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그런 분들께 드리는 노래입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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