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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기자의 도전 '지옥의 명절 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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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기자의 도전 '지옥의 명절 택배'

입력
2015.09.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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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평균 350여개 배달 강행군… 화장실 갈 시간 없어 요강 준비도

과일 등 추석 선물 신선제품 많아 배송 불만 신고에 배상할 땐 억울

추석을 사흘 앞둔 24일 서울 잠실동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단지에서 택배기사 김병운(오른쪽)씨가 본보 사회부 정준호 기자와 함께 명절을 앞두고 한꺼번에 몰린 배송품을 배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추석을 사흘 앞둔 24일 서울 잠실동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단지에서 택배기사 김병운(오른쪽)씨가 본보 사회부 정준호 기자와 함께 명절을 앞두고 한꺼번에 몰린 배송품을 배달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24일 오전 6시 30분 경기 하남시 덕풍동에 위치한 CJ대한통운 송파지점 터미널. ‘위잉~’소리를 내며 분당 40m 속도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로 굴비, 사과, 한우 등 추석 선물세트 상자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날 기자가 맡은 업무는 밀려드는 상자 더미 속에서 서울 잠실동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주소가 찍힌 상자를 골라 내는 일. 벨트 위로 움직이는 상자에서 알파벳과 숫자로 조합된 코드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니 ‘매의 눈’을 장착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옆에서 일을 하던 택배기사 김병운(54)씨의 손놀림은 한결 여유로웠다. 쏟아지는 택배상자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어느새 기자가 놓친 택배상자들까지 집어내 1톤짜리 탑차에 차곡차곡 싣고 있었다.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둔 열흘은 택배기사들에게 ‘지옥 같은 열흘’로 불린다. 평소보다 물량이 두 배가량 몰리기 때문이다. 이날도 이곳 터미널에 전국 각지에서 송파구로 가는 2만5,000여개의 택배상자가 배달됐다. 80여명의 택배기사들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하차작업을 시작했다.

물류작업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특히 2.3m 높이의 1톤 탑차에 배달 동선과 크기 등을 고려해 ‘테트리스 게임’ 하듯 차곡차곡, 가능한 한 많이 쌓는 것이 관건이다.

오전 분류작업이 끝나자 컨베이어 벨트는 바로 식탁으로 변신했다. 밖에서 밥 먹을 시간이 따로 없어 기사들은 벨트 위에 배달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김씨는 이날 아내가 싸준 제육볶음밥과 김치를 벨트 위에 펼쳐놓고 10분 만에 허겁지겁 해치웠다.

이날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18개 동에 김씨와 기자가 배달할 물건은 총 203개. 가장 대목이었던 지난 1주일 동안은 평균 350여개를 배달하는 강행군을 했다. 선물들이 몰리기 시작한 15일부터는 아내와 고등학생인 아들까지 나서 일손을 도왔지만, 늦은 밤이 돼서야 겨우 배송을 마칠 수 있었다. 김씨는 “지난주 가장 많을 때는 440개의 물량을 소화하기도 했다”며 “다른 택배기사들도 배송기한을 맞추기 위해 아내, 장인어른, 자식 등 온 가족을 총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 갈 시간이 없는 기사는 요강을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배송 작업은 낮 12시 시작됐다. 택배 상자 대여섯 개를 한아름 안고 아파트 꼭대기 층부터 아래 층까지 헐레벌떡 뛰어 다니는 고난의 행군이 계속됐다. 무거운 과일상자와 생선박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을 반복하자 입에서 단내가 났다.

외제차가 유난히 많은 이 아파트 단지에는 와인, 한우, 전복 등 고가의 선물상자 등이 즐비했다. 이 곳은 도지사를 지내고 있는 유력 정치인을 비롯해 대외활동이 활발한 유명 교수, 법조인, 스포츠 스타 등의 인사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피로가 몰려오는 시점에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세요”라는 쌀쌀한 응대를 접할 때면 태엽처럼 맥이 풀렸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작업은 절반 정도 지난 무렵 처음 고비를 만났다. 한 택배상자에서 6호까지 있는 아파트에 7호로 끝나는 주소가 기입된 것. 김씨는 “명절만 되면 주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선물을 보내는 일이 허다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추석 선물은 대부분 식재료나 과일 등 신선 제품이라 배송 불만 신고도 잇따른다. 김씨도 지난주 한 홈쇼핑 업체에서 보낸 사과를 배달했다가 안에 있던 사과가 상했다는 이유로 돈을 물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 배송료 2,500원 가운데 800원가량이 그의 몫이다. 기본급 없이 건당 수수료를 받는 지입기사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인 셈이다. 김씨는 “겉보기에 상자가 멀쩡한데도 내용물에 문제가 생기면 택배기사와 운송업체 등에서 배상해줘야 하는 일이 빚어지기도 한다”며 “명절 때마다 영문도 모르고 돈을 내야 할 때면 억울한 기분도 든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지옥 같은 열흘이지만 그래도 김씨는 추석이 반갑다. 흘린 땀만큼 가족들의 추석도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처럼 호화 선물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선물을 전달해주는 내게도 보람찬 시간”이라며 “고생하는 기사들에게 ‘고맙다’는 말로 받아주는 것만해도 감사하다”며 미소를 지었다.

정준호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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