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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코스모스

입력
2015.09.2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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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명랑한 꽃이다. 그리고 순정한 고향의 꽃이다. 쑥부쟁이 들국화 꿀풀 같은 가을 꽃들이 저만치 갈잎 물들어가는 언덕과 산자락에서 제 고독의 외투를 걸치고 가벼워지는 영혼의 품위를 들어낼 때, 코스모스는 모여서 합창하는 꽃이다. 코스모스는 모여 있으나 광장의 군중 같은 꽃이 아니라 나란히 줄지어서 우리들의 여정을 박수 쳐주는 순진하고 해맑은 꽃이다. 그래서 함민복 시인은 코스모스를 ‘여선생 호루라기 소리에 나란히 줄지어선 꽃’이라고 감탄스럽게 표현했는지 모른다.

처음 봉화로 삶의 터전을 옮길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갈 그곳이 물질 아닌 꽃을 받드는 마을이면 멋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곳은 꽃을 사랑하는 고장임을 눈으로 본다. 첩첩 산줄기를 휘돌아가는 국도변이나 가을볕 아래 붉게 익은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한적한 과수원 길에도 나란히 줄지어서 곱게 피어난 꽃들로 가득하다.

빨간 사루비아 빼곡히 늘어선 구간을 지나면 울긋불긋 백일홍이 바통을 이어받고 다음엔 해바라기, 칸나가 마을의 진입을 환영한다. 이 모든 호사가 봄부터 모종을 옮겨 심고 풀을 베어주고 가꾸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근로의 대가임을 생각하면 더 애틋하고 아련한 마음이 든다. 때론 이렇게 흙으로 부르튼 농부의 손에서 나가는 세금이 오일장터에서 돌아오는 그들의 굽이진 길가에 꽃으로 피어날 때, 빈약한 면 살림의 세수를 나눌 줄 아는 행정 씀씀이도 정겹다.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선량하게 만든다.

나는 그 여러 꽃길 중에서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늘어선 길을 제일 좋아한다. 어느 때는 일부러 돌아서 온다. 철길의 선로처럼 늘어선 코스모스 꽃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현재를 이탈하여 소년의 꽃길을 가고 있다.

내가 어릴 땐 동네마다 주로 아이들이 꽃길을 가꾸고 마을길을 빗자루로 쓸곤 했다. 비가 온 다음날이면 영란이, 진희, 애순이, 한순이, 미애, 희용이, 정수, 성수, 동희, 택동이…. 모두 호미 한 자루씩 들고 나와 대장인 성운이 형이 나눠주는 코스모스 모종을 들고 동네 길에 촘촘히 심고 학교로 가는 읍내길까지 남는 대로 죽 심었다. 그러면 다음 마을 아이들이 이어서 심고 또 심고 하여 읍으로 가는 비포장 십리 길이 가을이면 온통 아련한 코스모스 꽃길이 되었다.

그 길을 따라 아이들은 보자기 책가방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메고 필통을 달그락거리며 마라톤으로 달려 학교에 가서는, 혼자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고 어린 마음에도 쓸쓸한 폼 잡으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선생님 말씀 “야 인마! 너는 어떻게 사구는 삼십육인데 구사는 삼십팔이냐?” 꿀밤 맞은 머리를 스윽 문질러보며….

종알종알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서 심심해진 아이들은 ‘책가방 대신 들고 가기 가위 바위 보’를 곧잘 하곤 했는데 하루는 6학년 정재 형과 기복이 형이 뒤 쫓아 오더니 “야 너네 우리 가방 다 들고 가!” “에이, 싫어!” 했더니 “그럼 느덜 퇴학시킨다!” 깜짝 놀란 성수와 나는 순간적으로 패대기 친 형들 가방으로 개구리처럼 다이빙 했다.

내일은 추석이다. 그리고 오늘은 고향으로 가는 모든 길 위에 우리가 있는 날이다. 동구까지 나와 줄지어서 환영하는 코스모스가 있는 그곳에 주름 깊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꽃길을 함께 가꾸던 친구들이 있다. 선산 이곳 저곳에 누워계신 나와 내 아이들의 조상님들도 봉분을 단정하게 이발하시고 연어처럼 회귀하는 후손들을 그윽하게 바라보실 것이다.

조금은 멀고 더디고 때론 꾀가 나더라도 우리가 깨고 나온 알의 외피가 따뜻하게 남아 있는 곳, 외롭고 힘겨운 단독자의 일상에 ‘우리’라는 위로와 연대의 정맥이 면면히 흐르는 곳, 삼색의 코스모스가 까치발로 내다보는 마음 아득한 그곳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또는 가고 싶은 고향이다.

정용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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